인간의 취향은 정해진 과정에 의해 '매끈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친구가 권한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새로운 음악을 찾다가, 매장 직원이 추천한 옷을 입어보다 생각지도 못한 스타일을 발견한다. 실패와 우연, 타인의 개입 속에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간다.
하지만 인공지능(AI)이 골라주는 취향은 다르다. 과거 구매와 검색 이력, 대화 맥락 등을 바탕으로 내가 좋아할 만한 것만 추려준다. 거절도 갈등도 시행착오도 없는 관계다.
유통업계가 AI 쇼핑 에이전트를 앞세워 ‘나에게 딱 맞는 소비’를 만들어가면서, 알고리즘이 골라준 선택과 나의 취향 사이의 경계도 흐려지고 있다. AI가 내가 좋아할 만하다고 판단한 것을 나의 취향으로, 그 추천에 따른 선택을 나의 주관적 판단으로 받아들이면서다.
상품 추천을 넘어 취향 분석과 구매 결정까지 돕는 AI 쇼핑 에이전트가 유통업계의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그래픽 허프포스트코리아
유통업계의 AI 경쟁은 이제 상품을 추천하는 수준을 넘어 소비자의 선택 과정 자체를 대신하는 단계로 향하고 있다. 네이버는 최근 AI 쇼핑 에이전트를 정식 출시했다. 이용자가 “집들이용 밀키트로 뭐가 좋을까”처럼 상황을 설명하면 상품을 단순 나열하는 대신 상황별 구매 기준을 먼저 제시하고 상품과 혜택을 추천한다.
이용자의 70% 이상이 15자 이상의 긴 질의를 입력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지난 6월 일간 이용자 수는 3월 베타 출시 직후보다 50% 이상 늘었다. AI 쇼핑 에이전트를 통한 거래액도 2.7배 이상 증가했다.
쿠팡은 AI를 활용해 상품을 고르고 비교하는 과정 자체를 줄이고 있다. AI 기능을 상품 탐색과 비교, 구매 결정 전반으로 확대하면서다. AI는 수천 건의 리뷰에서 긍정·부정 의견을 추려내는 것은 물론, 고객의 생활환경이나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해 어떤 상품의 특징이 중요한지도 제시한다. 소비자가 검색 결과를 일일이 비교하며 판단하기보다 AI가 선택에 필요한 정보를 먼저 걸러주는 방식이다.
카카오는 쇼핑을 넘어 일상적 대화 자체를 소비의 출발점으로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화 맥락을 파악해 음식이나 상품을 추천하고 주문·결제까지 연결하는 에이전틱 커머스를 추진하면서다.
소비자가 별도의 검색어를 입력해 상품을 찾는 대신 카카오톡 등에서 자신의 필요를 이야기하면 AI가 의도를 파악해 적합한 선택지를 찾고 실제 구매 과정까지 돕는 구조다. 검색하고 비교한 뒤 구매하는 기존 방식에서, 말하고 추천받은 뒤 AI가 실행하는 방식으로 소비 과정이 바뀌고 있는 셈이다.
AI 쇼핑이 바꾸는 것은 상품을 찾는 방식뿐 아니라 ‘누구와 소비를 상담하느냐’다. “이거 어때?”, “뭐가 나한테 어울려?”, “부모님께 어떤 선물을 드릴까?” 같은 질문은 그동안 친구·가족·연인·판매원과 주고받았다. 소비는 상품을 고르는 행위인 동시에 다른 사람의 경험과 취향을 빌리고 자신의 선택을 확인하는 사회적 과정이기도 했다. 특히 선물은 상대방의 취향과 상황을 헤아리는 과정 자체가 관계의 일부였지만, 이제는 그 고민마저 AI에게 맡길 수 있게 됐다.
문제는 AI가 ‘나에게 맞는 것’을 골라줄수록 알고리즘의 선택과 나의 취향 사이 경계가 흐려질 수 있다는 점이다. AI는 과거 구매·검색 이력과 대화 등을 바탕으로 내가 좋아할 가능성이 높은 상품을 추천한다.
추천을 받아 선택하고, 그 선택이 다시 데이터로 쌓이는 과정이 반복되면 취향은 새롭게 발견되기보다 기존 취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굳어질 수 있다. ‘내가 좋아해서 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AI가 내가 좋아할 만한 것만 계속 보여준 결과일 수도 있다.
결국 AI의 개인화가 고도화될수록 ‘취향 소비’의 의미도 달라질 수 있다. 소비를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표현하던 취향이 스스로 탐색하고 만들어가는 것에서 알고리즘이 발견하고 최적화해주는 것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AI가 내가 좋아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