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반도체 연구개발(R&D) 분야 주 52시간 근로제 예외 적용을 주장하고 나서면서 파장이 일고 있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반도체 분야에 주 52시간 근로 적용 예외를 주장하면서 파장이 일고 있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지난 6일 6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이재명 대통령 역점 사업인 반도체 3대 메가클러스터 프로젝트 성공을 위한 일환으로 여겨지지만 ‘주 4.5일제’와 ‘포괄임금제 개선’ 대선 공약이 첨단산업 경쟁력 강화 논리에 밀려 뒷전으로 밀려나는 모양새다.
9일 정부와 정치권 움직임을 종합하면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과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첨단산업 경쟁력 확보와 노동 기본권 보장이라는 두 개의 가치를 두고 뚜렷한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최근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연구개발(R&D) 분야에 한해 주 52시간 근로제 예외를 허용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논쟁에 불을 당겼다.
김 장관은 지난 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토론회에서 "일하겠다는 젊은 사람들의 의지를 제도가 강제로 막아서는 안 된다"며 메가클러스터 특구 내 주 52시간 근로제 예외 적용을 주장했다.
심지어 중국의 근로시간 사례까지 거론하며 근로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노동시간 규제 완화 필요성을 주장해 논란을 키웠다. 국가 간 반도체 기술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연구개발 인력의 근로시간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산업계 요구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으로 해석된다.
김 장관은 "52시간제 이슈는 우리의 가장 큰 경쟁 상대인 중국과 비교해야 한다"며 "중국 충칭의 한 IT기업 관계자로부터 ‘996’(오전 9시 출근·오후 9시 퇴근·주 6일 근무) 제도를 도입하려 하자 종업원들이 ‘그렇게 일해서 다른 기업과 어떻게 경쟁하겠느냐’며 반발해 결국 밤 12시까지 일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주 52시간 근로제 예외 적용'이 이재명 정부가 출범 당시 내세웠던 노동 공약과는 결이 다른 행보라는 점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주 4.5일제 도입'과 '포괄임금제 개선'을 핵심 노동 공약으로 제시하며 '노동시간 단축'과 '공짜 노동' 근절을 약속했다.
그러나 '주 4.5일제 도입'이나 '포괄임금제 개선'은 구체적인 입법이나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한 반면, 주 52시간제 예외 논의는 산업 경쟁력을 이유로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직접 공개적으로 제기하며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실제 주 4.5일제는 아직 시범사업 수준에 머물러 있다. 고용노동부는 올해부터 노사 합의를 통해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기업에 장려금을 지급하는 '워라밸+4.5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지만 법정 노동시간을 줄이는 입법 논의는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포괄임금제 개선도 정체돼 있기는 마찬가지다. 정부는 2025년 8월 노사정·전문가 협의체인 '실노동시간 단축 로드맵 추진단'을 통해 포괄임금 오남용 방지 방안에 합의했고, 고용노동부는 올해 4월 '공짜노동 근절'을 목표로 지도지침을 시행했다. 그러나 포괄임금제 자체를 전면 금지하기보다는 오남용을 막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을 추진하기로 했다.
포괄임금제 개선과 관련해 노사정 합의를 반영한 근로기준법 개정안 역시 국회에 계류돼 있다. 즉, 법률상 포괄임금제를 원칙적으로 금지한 것은 아니라 행정지침과 감독 강화가 먼저 시행되는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이다. '노동시간 단축' 공약보다 '노동시간 규제 완화' 논의가 먼저 전면에 등장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홍성규 진보당 대변인은 7일 논평을 내어 "노동자들이 잔업에 특근까지 내몰릴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는 바로 최소 생계비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최저임금 때문"이라며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최저임금으로 살아나봤나"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이 활동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이번 주 52시간 근로제 예외 적용 논란을 두고 "노동자 안전을 강조하면서 주 4.5일제를 추진하겠다던 정부의 장관이 주 52시간 철폐를 얘기하는 게 말이 되느냐, 이 정부의 말과 행동이 불일치하는 행보가 몇번 째냐"는 취지의 비판이 나오고 있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왼쪽)과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이 지난 6월 국회 소통관에서 기쟈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게다가 노동계는 정부가 '첨단산업 경쟁력'을 앞세워 사실상 장시간 노동을 허용하려는 것 아니냐고 반발하고 있다. 실제 노동계가 반도체 분야 52시간 근로제 예외 적용에 거세게 반발하는 배경에는 반도체 분야에 예외가 허용될 경우 다른 분야까지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민주노총은 지난 7월31일 정부의 주 52시간 근로제 예외 적용을 비판하는 성명을 통해 "재계가 오랫동안 요구해 온 노동 규제 완화 방안이 메가특구를 통해 한꺼번에 추진되는 데 대해 강한 우려를 표한다"며 "전국적인 제도 개악에 대한 사회적 저항을 피하기 위해 특정 지역에서 먼저 시행한 뒤, 이를 전국 확산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시도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만일 정부가 메가프로젝트를 고리로 주 52시간 근로제 적용 예외를 관철시키려 한다면 대선과정에서 이 대통령을 지지하며 노사정 대화 참여에 한걸음 다가갔던 노동계와 정부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6일 출입기자단 간담회에서 "(국내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현재 주 52시간 근로제) 예외 없이도 지금 엄청난 이익을 내고 있다"며 "(주 52시간제 예외 허용이) 마치 빠지면 안 되는 것처럼 너무 과잉이 돼서 건강한 토론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