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국제형사재판소(ICC)를 무력화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이란전쟁 과정에서 제기된 전쟁범죄 혐의을 대해 기소되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 일각에서 나온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형사재판소(ICC) 본부. ⓒ 신화통신=연합뉴스
16일 월스트리트저널과 로이터를 비롯한 외신보도를 종합하면 미국은 ICC가 미국의 국가안보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기관이라는 주장을 바탕으로 동맹국들로 하여금 탈퇴를 종용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미국은 각 정부에 ICC 탈퇴를 촉구하고, ICC에 몸담고 있는 인물들에 대한 비자취소와 입국금지, ICC와 관련된 단체에 대한 경제제재 등을 검토하고 있다.
2026년 기준으로 ICC에는 한국, 일본, 영국, 캐나다, 프랑스, 독일 등 미국의 핵심 우방국을 포함해 125개 나라가 가입해 있어 미국의 압박이 동맹국 외교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마르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은 13일 영상 성명을 통해 "ICC는 총탄과 미사일이 아니라 법률과 협약 등 이른바 국제법의 힘을 이용해 미국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며 "동맹국과 협력해 벽돌을 하나 하나 떼어 내듯 ICC를 해체할 것이다"고 말했다.
미국은 왜 ICC를 정조준했나 : 로이터 "미군 군사행동 보호하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6년 7월15일(현지시각) 펜실베이니아주 칼라일 육군전쟁대학에서 열린 '국방혁신서밋'에서 발언하고 있다. ⓒ AP통신=연합뉴스
ICC는 2002년 로마규정에 따라 설립된 국제 상설재판소다. 로마규정은 △민간인 집단 또는 개별 민간인을 직접 겨냥한 공격 △예상되는 군사적 이점과 비교해 명백히 과도한 민간 피해를 인지하면서 공격을 감행하는 행위를 전쟁범죄로 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전쟁 과정에서 초등학교를 폭격해 170명 가까운 어린이를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과 이란의 발전소를 공격하겠다는 발언을 여러 차례 밝히면서 전쟁범죄 논란에 직면해 있다.
다만 미국은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조약인 로마규정의 당사국이 아니어서 원칙적으로 ICC의 관할권이 미치지 않는다. 또한 미국 대통령은 미국 연방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현직에 있을 때에는 직무상 행위에 면책권이 인정돼 사실상 처벌받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행정부가 ICC를 무력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배경에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쟁범죄로 기소될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과 정치적 방어심리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로이터는 13일 "트럼프 행정부가 ICC를 해체하려는 행보에 적극적인 이유는 향후 미군의 군사행동에 대해 ICC가 트럼프 행정부 관계자들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시도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바라봤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는 2025년 말 ICC에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고위관계자들을 기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내부 규정에 명문화하도록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이를 거부할 경우 자산동결, 비자취소 등 직접 제재를 가하겠다는 뜻도 내비친 것으로 전해진다.
루이스 모레노 오캄포 ICC 초대 수석검사는 올해 3월 영국 BBC와 나눈 인터뷰에서 "한 국가가 다른 나라의 주권과 영토를 침해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침략범죄"라며 "미국이 이란전쟁을 일으킨 것이 바로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보면 트럼프 대통령은 공직 수행이 끝난 뒤 미국의 정권교체가 이뤄질 경우 자신과 측근들이 ICC에 소추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제사회, 미국의 ICC 무력화 시도에 강력 반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 AFP통신=연합뉴스
국제사회는 미국이 ICC를 무력화하려는 시도에 반발하면서 정면충돌 양상을 보이고 있다.
아누아르 엘 아누니 유럽연합 외교담당 대변인은 14일 "유럽연합은 국제형사제도와 전쟁범죄 불처벌 관행 척결에 확고한 의지를 지니고 있다"며 "ICC의 선출직 공직자와 직원, 재판소에 협력하는 이들을 향한 공격이나 위협은 결코 용인될 수 없다"고 말했다.
ICC를 국제법 질서의 핵심기관으로 여기는 유럽이 미국의 위협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스테판 두자릭 유엔 대변인도 미국의 ICC 해체 움직임을 두고 "ICC는 국제사법체계에서 매우 중요한 축이고, 많은 회원국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중대범죄를 다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ICC를 두고 미국과 국제사회가 벌이는 갈등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ICC가 2024년 11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게 전쟁범죄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하자 반발해 2025년 6월 ICC 판사들을 제재한 바 있다.
이 당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ICC는 압박 없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며 "ICC 판사들을 향한 미국의 제재를 철회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폴커 튀르크 유엔 인권최고대표도 "ICC 판사에 대한 공격은 미국이 오랫동안 지켜온 법치주의와 평등원칙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고 비판했다.
미국의 ICC 무력화 움직임은 한국에도 직접적 영향을 줄 수 있다. 한국은 2016년부터 해마다 법관을 ICC에 파견하고 있다.
미국 국무부는 미국의 지원에 의존하면서도 ICC의 권한을 거부하지 않는 나라들에 더 높은 압박을 가하겠다고 밝히고 있어 한국도 사정권 안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