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새해 국정연설에서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연 1만5천 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풀타임으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직접 해보라(Go try it)."
이재명 대통령이 전세제도를 정조준하고 있다. 대통령은 지난달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전세 대출을 많이 해준 것이 집값 상승의 주된 원인이며, 그게 시장을 왜곡하고 있다"며 전세대출 축소를 예고했다. 정부는 공개 토론회와 23일 대통령 주재 대토론회를 거쳐 이달 말 부동산 종합대책을 내놓기로 했고, 전세대출을 조이는 방안들이 테이블에 올라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1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업무보고에서 보고 내용을 경청하고 있다. ⓒ 연합뉴스
문제의식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전세보증금은 집을 사려는 사람에게 사실상 무이자·무심사 레버리지로 기능해 왔다. 세입자의 보증금을 지렛대 삼아 집을 사들이는 갭투자는 집값 상승기에 투기 수요를 증폭시켰고, 하락기에는 깡통전세와 전세사기라는 청구서로 돌아왔다.
금융감독원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규제지역 아파트를 보유한 비거주 1주택자의 보증부 전세대출 잔액은 3월 말 기준 4조9천억 원, 약 3만 건에 이른다. 자기가 살지도 않을 집을 남의 보증금과 은행 돈으로 사들이는 이 돈줄을 끊어야 한다는 데 이견을 달기는 어렵다.
그러나 '갭투자 차단'과 '전세제도 소멸 유도'는 전혀 다른 층위의 이야기다. 전자가 제도의 악용을 도려내는 수술이라면, 후자는 그 제도 위에 얹혀 사는 수백만 가구의 삶의 조건을 통째로 바꾸는 일이다.
국토교통부 주택통계를 보면 올해 1~5월 서울 아파트 임대차 계약에서 월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51.3%로, 조사 이래 처음으로 절반을 넘어섰다. 1년 전 44.0%에서 7.3%포인트 뛴 것이다. 같은 기간 서울 아파트 신규 전세 평균 보증금은 6억5875만 원으로, 2년 전보다 1억 원 넘게(19.1%) 올랐다. 전세 물건은 씨가 마르고 있다. 부동산 빅데이터업체 아실 집계 기준 서울 아파트 전월세 매물은 3만7551건으로 2년 전보다 14.5% 줄었다.
그 결과 올해 아파트 전월세 거래는 전국 기준 7.2% 감소한 반면, 연립·다세대 등 비아파트 거래는 11.5% 늘었다. 아파트 전세에서 밀려난 임차인들이 보증금 인상분을 월세로 돌리거나 빌라로 옮겨가는, 이른바 '탈(脫)아파트' 현상이 시작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주목할 것은 이 품귀가 상당 부분 정책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토지거래허가구역 확대로 매수자에게 실거주 의무가 부과되면서 집이 한 채 팔릴 때마다 전월세 매물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고, 양도세 중과 시행을 앞둔 다주택자들의 매도가 이를 가속했다. 아파트 입주 물량도 2024년 32만 가구에서 올해 17만5천 가구로 반토막 났다.
여기에 갭투자 돈줄이 막히면 전세 공급은 한 번 더 줄어든다. 세입자의 보증금을 지렛대 삼아 집을 산 이들이 내놓던 집이 곧 전세 매물이었기 때문이다. 무주택자의 전세대출을 한 푼도 건드리지 않더라도, 매물이 줄어 전셋값이 오르면 그 비용은 결국 세입자에게 청구된다. 공급이 줄어 전셋값이 오르는데, 전세를 놓을 유인마저 사라지는 셈이다. 갭투자를 막는다는 정책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희생되는 사람들은 전셋집을 구하기 어려워지는 서민들인 셈이다.
더 커다란 문제는 당국이 이 비용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희생'으로 보고 있다는 데 있다. 이창용 전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해 6·27 대책을 평가하며 이렇게 말했다. "전세 실수요자들이 고통을 받게 되겠지만, 이런 문제가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는 어렵다." 실수요자의 고통을 정책의 부수적 비용으로 감수하겠다는 이야기다.
대통령이 사용하는 단어도 공교롭게도 '정상화'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전세를 두고 "정상화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고, 14일 국무회의에서도 부동산 세제를 두고 "집값을 눌러보겠다는 게 1차 목표가 아니고, 정상화가 1차 목표"라고 했다. 전세를 두고 “조금씩 사라져가지 않을까 싶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문제는 그 정상화의 비용을 치르는 쪽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자기 집이 있는 사람은 전세가 사라져도 아쉬울 것이 없다. 전세보증금 외에 목돈이 없는 사람, 월세로 밀려나는 순간 저축 여력이 사라지는 무주택 서민이 '정상화'의 대가를 치른다.
물론 정부도 무주택 실수요자는 보호하겠다고 말한다. 전세대출 보증비율을 줄일 때도 무주택자는 대상에서 제외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대출이 남아 있어도 얻을 전세가 없다면 보호는 성립하지 않는다. 세입자가 사는 곳은 대책의 발표문 속이 아니라, 매물이 마르고 월세가 절반을 넘어선 시장이다.
'전세를 얻지 못하면 월세로 살면 되지', 라는 이야기는 '쌀이 없으면 고기죽을 먹으면 되지(何不食肉糜)'라는 말 만큼이나 현실과 아득히 동떨어져 있다.
전세 2억 원짜리 낡은 빌라 기준 대출 비율 80%, 이율 4%를 적용했을 때 해당 가구가 매달 내야 하는 이자는 약 50만 원 수준이다. 하지만 같은 빌라를 월세로 신규계약한다고 가정한다면, 보증금 4천만 원을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월세는 약 80만 원으로 뛴다. 실제 거래 관행상 보증금 1천만 원을 월세 5만 원으로 치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월 30만 원의 차이가, 바로 전세가 ‘정상화’되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부수적 비용이다.
갭투자를 가능케 하는 연결고리를 끊는 것과, 전세제도 자체를 청산 대상으로 규정하고 소멸을 재촉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전자가 사다리의 썩은 칸을 갈아 끼우는 일이라면, 후자는 사다리를 통째로 치워버리는 일이다. 정부의 대책의 방향 자체는 전자에 가깝다. 문제는 대책이 놓일 시장이 이미 세입자에게 청구서를 보내고 있고, 정책 결정권자들이 그 청구서를 '정상화의 비용'이라 부르고 있다는 데 있다.
전세가 언젠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제도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소멸을 가속한 것이 정부 정책이라면, 속도를 관리할 책임도 정부에 있다. 연착륙과 추락의 차이는 그 위에 사는 사람들이 온몸으로 감당하게 된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자료에 따르면 올해 1~5월 서울 아파트 신규 월세 계약의 평균 월세는 보증금을 빼고도 137만3천 원이다. 게다가 이 평균에는 억대 보증금을 걸고 월세를 10만~20만 원만 얹는 이른바 '반전세' 계약까지 포함돼 있다. 적은 보증금으로 순수 월세로 밀려나는 서민이 체감하는 실부담은 이 숫자보다 훨씬 크다.
대통령은 14일 국무회의에서 유튜브 실시간 댓글로 보유세 기준에 대한 국민 의견을 직접 물었다. 물을 것이 하나 더 있다. 전세가 사라지는 것이 ‘정상’이라는, 전셋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희생을 ‘어쩔 수 없다’고 표현하는 정책 결정권자들에게 되묻고 싶다.
매달 137만 원의 월세를 내면서 한 가정을 부양하고, 조금씩 저축을 모아가며 내 집 마련의 꿈을 꿀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