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임신중지 의약품 '미프진' 도입 검토를 주문하면서 국내에서도 관련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법적 기준과 안전관리 체계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도입을 서두를 경우 여성 건강과 의료 현장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며 반발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14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14일 성명을 통해 정부의 미프진 검토를 두고 "여성의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와 태아의 생명권 보호를 아우르는 현실적인 법적 기준(대체입법)부터 조속히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의사회는 이어 "임신중지 약물의 도입은 반드시 전문의의 초음파 진단을 통한 임신 주수 확인과 투약 후 사후 관리 시스템이 선제적으로 구축된 이후 논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사회는 미프진이 임신 주수 확인과 자궁 외 임신 여부 판단 등 의료적 관리가 필요한 약물이라며, 무분별한 유통이 이뤄질 경우 대량 출혈·감염·불완전 유산 등 부작용 위험이 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 허용 기준과 사용 주수를 담은 법적 기준 없이 의사의 판단에만 맡길 경우 의료 현장이 사법적 분쟁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며 모자보건법 개정 등 명확한 제도 마련을 요구했다.
미프진은 주성분인 미페프리스톤이 임신 유지에 필요한 호르몬인 프로게스테론의 작용을 차단하는 약물로, 일반적으로 임신 초기(9주 이내)에 사용된다. 국내에서는 미프진이 정식 허가되지 않아 일부 여성들이 해외 비공식 경로를 통해 약물을 구하려는 사례가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정부가 관리 체계 안에서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과, 의료 안전망 없이 유통될 경우 위험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맞서고 있다.
해외에서는 미프진을 둘러싼 논쟁이 '도입 찬반'을 넘어 법과 의료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의 문제로 발전해 왔다. 국가마다 접근 방식은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약물을 제도권 안에서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가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프랑스, 임신중지권 보장 후 미프진 의료 시스템에 편입
프랑스는 1975년 '베유 법(Loi Veil)'을 통해 임신중지를 합법화한 뒤, 1988년 세계 최초로 미프진을 공식 승인했다. 임신중지에 대한 법적 권리를 먼저 마련한 뒤 약물적 방법을 의료 시스템 안에 편입한 것이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2025년 1월 프랑스 의사이자 생물학자인 에티엔 에밀 보리외를 조명하며, 그가 개발한 RU-486(미페프리스톤·미프진의 성분명)이 여성들이 수술 없이 임신중지를 할 수 있도록 한 의학적 전환점이었다고 소개했다. 보리외는 미프진을 여성이 자신의 몸에 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도구로 바라봤다.
하지만 도입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임신중지 반대 단체들은 미프진 승인이 임신중지 확대를 불러올 것이라며 반발했다. 그럼에도 프랑스 정부는 의료진 관리 아래 약물을 활용하는 방향을 택했다. 프랑스 보건당국은 약물의 효과와 안전성을 검토한 뒤 초기에는 지정 의료기관과 의사의 관리 아래 제한적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이후 프랑스에서 미프진을 둘러싼 논쟁의 초점은 '도입 여부'에서 '안전한 접근성과 의료 서비스 관리' 문제로 이동했다. 2023년 4월 르몽드는 일부 약국에서 임신중지 약물인 미소프로스톨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자, 프랑스 사회의 관심이 미프진을 허용할 것인가에서 필요한 여성이 제때 안전하게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옮겨갔다고 보도했다.
미국 FDA 승인했지만 법정 공방 중심에, '임시중지권' 두고 여전히 갈등
미국에서는 미프진이 임신중지권을 둘러싼 정치·법적 공방의 핵심 쟁점이 됐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2000년 미프진 사용을 승인했고, 이후 임신 초기 약물 임신중지의 주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2022년 연방대법원이 임신중지권을 보장했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하면서 미프진은 임신중지권을 둘러싼 법적 공방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2024년 연방대법원은 미프진 접근 제한 소송을 기각했지만, 약물 자체의 안전성이나 임신중지권에 대한 최종 판단은 아니어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2023년 임신중지약 승인한 일본, 배우자 동의 두고 비판의 목소리
일본은 2023년 미프진 계열 경구 임신중지약을 승인했다. 도입 과정에서는 배우자 동의 요건이 또 다른 쟁점으로 떠올랐다. 일본은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 기존 모체보호법에 따라 약물 임신중지에도 원칙적으로 배우자 동의를 요구하고 있다.
여성단체와 일부 법률가들은 임신과 출산의 신체적 부담을 지는 당사자인 여성의 결정에 배우자의 동의를 요구하는 것은 자기결정권을 제한할 수 있다며 제도 개선을 요구해왔다.
이재명 정부는 임신중지 약물 도입을 국정과제로 추진하고 있지만, 제도 정비는 여전히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다. 2019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이후에도 관련 입법은 이뤄지지 않았고,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법적 기준이 우선 마련돼야 한다는 이유로 미프진 허가 심사를 보류하고 있다. 국회에는 약물을 이용한 임신중지 허용 범위와 절차 등을 담은 모자보건법 개정안 등이 계류 중이다.
해외 사례가 보여주듯, 미프진 논쟁은 단순한 허용 여부에 그치지 않는다. 각국은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 보호, 의료 안전과 국가의 관리 책임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를 놓고 서로 다른 제도를 마련해 왔다. 한국 역시 약물 도입 여부뿐만 아니라 여성의 건강권과 의료진의 책임, 법적 기준과 의료 안전망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제대로 시작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