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한화오션 같은 기업들은 더 이상 낯선 이름이 아니다. 한국 기업들은 반도체와 조선, 방산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산업 경쟁력을 기업의 경쟁력과 동일시해 왔다. 좋은 기업이 많으면 산업도 강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최근 두 사건은 이 익숙한 공식에 질문을 던진다. 캐나다 차세대 잠수함 사업(CPSP)과 정부가 발표한 광주·호남권 반도체 중심의 '3대 메가프로젝트'다. 하나는 해외 수주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 투자 정책이지만 두 사건이 보여주는 메시지는 의외로 닮아 있다.
우리 기업들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서는 정부의 노력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가고 있다. AI 이미지
우리는 캐나다 잠수함 사업을 두고 ‘한화오션이 수주에 실패했다’고 표현한다. 물론 계약의 당사자는 기업이다. 그러나 캐나다가 평가한 것은 잠수함의 성능만은 아니었다. 수십 년에 걸친 유지·보수 체계, 산업 협력, 공급망의 안정성, 정부 사이 안보 협력과 외교적 신뢰까지 함께 검토했다.
캐나다 정부는 일찍부터 한화오션과 독일 경쟁사의 잠수함 기술력이 모두 캐나다군의 요구를 충족한다고 판단했다. 최종 선정은 잠수함의 성능보다 캐나다에 제공할 경제적 효과가 핵심 기준이 될 것이라고 봤다. 다시 말해 한국 기업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파트너를 평가한 셈이다.
광주·호남권 메가프로젝트도 비슷하다. 정부는 대규모 반도체 투자와 산업 육성 계획을 내놓을 것이라고 알려졌었고 관심은 자연스럽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얼마나 투자할지에 쏠렸다.
그러나 기업에 더 중요한 것은 투자 규모보다 앞으로 20년, 30년 동안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지다. 충분한 전력과 용수, 숙련된 인재의 배치와 육성, 촘촘한 협력업체 생태계, 규제의 예측 가능성 등이 모두 투자 결정의 일부다. 기업이 평가하는 것은 특정 부지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투자 환경이다.
두 사례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공통점은 기술력이 더 이상 승부를 결정하는 유일한 요소가 아니라는 데 있다. 그 이후의 경쟁은 정부가 얼마나 국가 차원의 지원을 할 수 있는지, 안정적 산업 생태계를 갖추고 있는지, 기업이 안심하고 장기 투자를 이어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했는지에 달려 있다.
우리는 여전히 기업 중심으로 산업을 바라본다. 수주에 실패하면 기업의 경쟁력을 먼저 의심하고 대규모 투자가 발표되면 어느 기업이 얼마를 투자할지부터 따진다. 물론 기업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제 기업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 훨씬 많아졌다.
방산 기업은 무기를 만들지만 동맹과 외교는 정부가 만든다. 반도체 공장은 기업이 짓지만 전력망과 용수 공급체계는 국가가 구축한다. 인재도 국가 시스템 안에서 길러지고 협력사 생태계는 지역 산업이 함께 성장해야 조성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국가가 풀어야 할 과제까지 기업의 몫으로 돌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왜 수주하지 못했느냐’, ‘왜 더 투자하지 않느냐’는 질문은 쉽게 던지면서도 기업이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을 국가가 제대로 만들고 있는지는 상대적으로 덜 묻는다. 정부는 대통령 5년 임기의 불연속성의 한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어떤 부지가 국가산업단지로 지정만 되면 기업들이 찾아올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기업은 세계를 상대로 경쟁하고 있지만 정작 산업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여전히 기업 단위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앞으로의 산업 경쟁은 기업과 기업의 대결이 아니다. 기업과 정부, 더 나아가 대학과 연구기관, 금융과 지역사회가 함께 만들어낸 시스템과 시스템의 경쟁이다. 세계 시장에서 기업은 국가를 대표하지만 세계는 기업만 평가하지 않는다. 그 기업을 뒷받침하는 국가의 역량까지 함께 평가한다.
캐나다 잠수함 사업은 한 기업의 수주 실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광주·호남권 메가프로젝트 역시 기업 몇 곳의 투자만으로 완성될 사업이 아니다. 두 사건이 던지는 질문은 결국 하나다. 우리는 세계적 기업을 여럿 키워냈는데 제조업 강국이라는 찬사만큼이나 세계적 산업 강국으로 성장할 준비도 함께 하고 있는가다.
이제 산업정책의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어떤 기업을 더 키울 것인가를 넘어 세계 최고 기업들이 가장 경쟁하기 좋은 국가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세계 시장에서 한국 기업은 국가의 얼굴이다. 뛰어난 기술은 이제 세계 경쟁시장에 참여하기 위한 출전 자격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국가는 이제 기업의 뒤에서 지원하는 스태프가 아니라 기업과 함께 경쟁하는 또 하나의 선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