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미국 이란 전쟁이 끝났지만 에너지 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지구 차원의 탄소 규제는 강화될 일만 남았다. 대한민국 제조업은 기후 위기 속에서 '생존'이란 화두를 떠올린다. '한국형 녹색 대전환(K-GX)'은 생존을 위한 목숨줄이다. 그러나 제도는 미흡하고, 관심은 부족하다. 허프포스트코리아가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과 25일 공동 개최하는 '2026 기후경쟁력포럼’을 앞두고, 녹색 전환을 위한 전략과 과제를 짚어본다.
대규모 전력이 필요한 산업을 향한 '탈탄소' 요구가 더욱 거세지고 있다. AI 이미지.
기후에너지환경부는 6월23일(현지시각) 영국 런던에서 ‘글로벌 에너지전환 및 전기화 고위급회의’를 계기로 진행된 ‘전기화 지금(Electrify Now)’ 이니셔티브 출범에 동참했다.
전기화 지금 이니셔티브는 산업·건물·수송 부문의 전기화 확대와 전력망 및 에너지저장장치(ESS) 확충, 청정에너지 보급 등을 통해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고 청정에너지 전환을 가속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글로벌 협력 플랫폼이다.
유럽연합(EU)을 비롯한 다수의 국가와 국제에너지기구(IEA), 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 등 참여 기관들은 중동정세 불안과 변동성 확대로 에너지 안보 강화 및 탄소중립의 필요가 높아진 현재 친환경에너지 및 전력을 글로벌 핵심 의제로 삼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우리 기업들에게는 ‘친환경 전력’을 확보하고 조달하는 일은 단순히 에너지 안보나 탄소중립 목표 달성 같은 당위 차원이 아니라 직접적 생존이 걸린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제품 성능과 가격뿐 아니라 얼마나 깨끗한 전력으로 생산했는지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공급망 전반에서 탄소 배출 규제가 강력한 장벽으로 작동함에 따라 국가 경제를 견인하는 동시에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배터리 산업은 저탄소 생산 공정 전환 및 친환경 전력 조달 여부가 향후 글로벌 시장에서 수주 경쟁력과 초격차 유지를 좌우할 핵심 역량으로 떠올랐다.
◆ AI 데이터센터: 전력 먹는 하마? 이제는 ‘착한 전기’가 필요하다
생성형 AI 모델의 확대에 따라 데이터 처리 및 연산에 요구되는 전력 소모량이 급증하고 있다.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대규모로 가동하는 AI 데이터센터는 전력 소비뿐만 아니라, 발열 제어를 위한 수랭식 냉각 설비 운영에 대규모 수자원을 소모한다.
특히 로봇, 스마트 가전, 자율주행 등 하드웨어와 연계된 '피지컬 AI' 산업이 본격화되면서, 실시간 물리적 데이터 처리를 위한 데이터센터의 전력 부하는 국제에너지기구(IEA)의 기존 전망치를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데이터센터는 단순 정보통신(IT) 인프라를 넘어 국가 전력망 수급에 직결되는 핵심 산업 시설로 재편되고 있다.
그러나 데이터센터를 운영하고 소비하는 기업들에는 단순히 막대한 전력을 확보하는 일만이 과제가 아니라는 시각이 나온다. 글로벌 환경 규제에 대응하기 위한 친환경 전력 확보가 데이터센터 인프라 확장의 필수 전제조건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30년 '탄소 네거티브' 목표를 위해 소형모듈원전(SMR)을 통한 전력 확보를 추진하고 있고 구글과 아마존 역시 재생에너지 전력구매계약(PPA)을 확대하고 공급망 전반에 24시간 무탄소에너지(CFE) 사용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도 AI 데이터센터의 안정적 전력을 공급하는 데서 친환경 전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5월12일 기후에너지환경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AI 데이터센터 안정적 전력공급을 위한 부처 사이 업무협약’을 맺으며 “재생에너지 중심의 에너지 대전환을 가속화해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는 한편 AI 데이터센터를 비롯한 첨단산업 발전을 뒷받침하는 전력산업구조를 확립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 반도체: 초미세 공정 고도화와 전력 수요 증가, 고객사는 친환경을 요구한다
AI 시대 고대역폭메모리(HBM) 주역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현재 우리 산업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핵심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기업들의 고민은 단순히 기술 경쟁, 수율 향상, 고객사 확보에 그치지 않는다. 막대한 전력에 동반되는 탈탄소 요구가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HBM 등 첨단 반도체는 제품 단위의 저전력·고효율을 지향하나 제조 공정은 전력 집약적 특성을 띤다. 나노미터(nm) 단위의 초미세 공정에 필수적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운영, 클린룸 24시간 가동, 웨이퍼 세정용 초순수 생산 과정에 대규모 전력이 투입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주요 제조사들의 HBM 및 AI 가속기용 반도체 생산라인 증설 계획 또한 대규모 전력 공급을 전제로 하고 있어 안정적 전력 확보는 반도체 제조 경쟁력의 핵심 요건이다.
주요 변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핵심 고객사인 애플, 엔비디아 등 글로벌 팹리스 고객사들의 '스코프3' 감축 요구다. 스코프3은 회사 공급망과 가치사슬의 탄소 배출량을 말한다. 제조 협력사에게 깨끗한 전력으로 제품을 생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세계적 수준의 수율과 제조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재생에너지 조달 여건 등을 개선하고 국가 차원의 전력망 확충이 신속하게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전영현 삼성전자 DS부문 대표이사 부회장은 ‘삼성전자 지속가능경영보고서 2025’ CEO 메시지에서 “첨단 기술의 도입에 따른 에너지 수요의 증가는 지속가능한 성장에 새로운 도전과제가 되고 있다”며 “탄소 감축과 무탄소에너지 사용을 요구하는 고객들의 요구에 맞춰 친환경에너지 활용 방안을 모색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강조했다.
◆ 배터리: 성능과 가격에 이은 새로운 기준, 제조 공정 내 '탄소 발자국'이 경쟁력 가른다
배터리는 전기자동차와 에너지저장장치(ESS)라는 친환경 에너지를 이끄는 핵심 산업이지만 생산 과정만 놓고 보면 대표적 에너지 다소비 업종으로 꼽힌다. 양극재 등 핵심 소재를 고온에서 소성하고, 전극을 건조하며, 배터리 셀을 충·방전해 활성화하는 공정에는 막대한 전기와 열에너지가 투입된다.
이에 따라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국내 배터리3사는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량 관리가 새로운 경쟁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배터리 산업은 첨단 제조업 가운데서도 환경 규제가 가장 빠르게 현실화되고 있는 분야로 꼽힌다. 유럽연합(EU)은 광물 채굴부터 소재 가공, 셀 제조, 운송, 사용, 재활용에 이르는 전 생애주기의 탄소 배출량을 측정해 공개하는 '배터리 탄소 발자국'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나아가 배터리에 사용된 원재료와 탄소 배출량, 재활용 정보 등을 디지털 형태로 관리하는 '배터리 여권' 제도도 추진하고 있다. 향후 일정 기준을 초과한 제품은 유럽 시장 진입 자체가 제한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과거에는 성능과 가격이 경쟁력을 결정했다면 이제는 얼마나 적은 탄소를 배출하며 생산했는지도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된 셈이다.
중국 기업들이 가격 경쟁력과 대규모 생산능력을 앞세워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는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은 기술력뿐 아니라 저탄소 생산 역량에서도 차별화를 이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배터리 소재부터 셀 생산, 재활용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의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것이 새로운 경쟁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만큼 기업들의 공정 전환 부담을 완화하고 안정적 친환경 전력 공급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경영전략과 정책 대응이 동시에 요구된다.
LG에너지솔루션은 ‘2024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리포트’에서 “EU 및 주요 선진국을 중심으로 배터리 제품의 지속가능성 요구가 강화하고 있고 이에 따라 고객사로부터 제품의 탄소 발자국 정보 요구가 지속해서 증가하고 있다”며 “이런 규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탄소 배출 산정 시스템을 구축하고 협력사까지 제조 전력을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데 힘쓰고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