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미국 이란 전쟁이 끝났지만 에너지 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지구 차원의 탄소 규제는 강화될 일만 남았다. 대한민국 제조업은 기후 위기 속에서 '생존'이란 화두를 떠올린다. '한국형 녹색 대전환(K-GX)'은 생존을 위한 목숨줄이다. 그러나 제도는 미흡하고, 관심은 부족하다. 허프포스트코리아가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과 25일 공동 개최하는 '2026 기후경쟁력포럼’을 앞두고, 녹색 전환을 위한 전략과 과제를 짚어본다
23일 석유화학업계에 따르면 탄소중립산업법은 생산량 확대 중심의 성장 모델에서 벗어나 친환경·고부가가치 소재 중심으로 산업 구조를 재편하는 데 방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연합뉴스
국내 석유화학 업계가 생존과 친환경 전환 사이에서 갈림길에 서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주요 기업들은 재활용 플라스틱과 바이오 소재를 앞세워 친환경 전환에 나섰지만, 업황 악화가 장기화되면서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다. 석유화학 업계 안팎에서는 정부가 추진 중인 탄소중립산업법이 침체된 친환경 투자에 다시 불을 지필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23일 석유화학업계에 따르면 최근 논의되고 있는 탄소중립산업법은 단순한 지원 정책을 넘어 산업 구조 전환을 촉진하는 성격이 강한 것으로 평가된다. 삼정KPMG는 최근 발간한 'K-스틸법·석유화학 특별법으로 본 철강·석유화학산업' 보고서에서 철강·석유화학 산업이 글로벌 수요 둔화와 중국 중심의 공급 구조 변화, 에너지·원자재 비용 상승, 탄소 규제 강화 등으로 기존 성장 모델의 지속 가능성이 약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보고서는 특별법의 핵심을 '사업재편 촉진'과 '저탄소·고부가가치 산업 전환'으로 분석했다. 특히 석유화학 특별법은 공급 과잉 해소를 위한 사업 재편과 함께 친환경·고부가 제품 중심의 산업 구조 전환을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석유화학 업계에서는 탄소중립산업법 역시 단순한 환경 규제가 아닌 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경쟁력 회복과 체질 개선을 위한 제도적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산업 전환의 필요성이 커진 시점에 석유화학 업계의 투자 여력은 오히려 약해지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LG화학과 롯데케미칼, SK지오센트릭, 한화솔루션 등 주요 기업들은 폐플라스틱 재활용과 바이오 소재 등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내세우며 친환경 사업 확대에 나섰다. ESG 경영 열풍 속에서 친환경 소재가 새로운 성장 축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2년 하반기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중국의 대규모 설비 증설로 글로벌 공급 과잉이 심화되고 경기 둔화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중국산 저가 물량이 쏟아지자 국내 기업들이 강점을 지녀왔던 범용 석유화학 제품의 경쟁력은 빠르게 약화됐고, 업계 전반이 생존과 구조조정을 우선 고민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실제로 주요 기업들은 수년째 실적 부진을 겪고 있다. 일부 기업은 적자를 기록했고, 합작사인 여천NCC 역시 구조조정과 사업 재편에 나서는 등 업계 전반이 생존에 집중하고 있다. 정부도 지난해부터 석유화학 산업 경쟁력 제고를 명분으로 국내 NCC 생산능력을 최대 25% 감축하는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다. 울산·여수 산업단지를 중심으로 기업 간 설비 통합과 감산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이해관계가 엇갈리며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업황 악화는 친환경 투자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SK지오센트릭은 울산 ARC 사업의 사업성을 재검토하며 투자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 당초 2025년 말 완공을 목표로 했지만 일정이 지연되고 있으며, 석유화학 업계에서는 사실상 사업 재조정 국면에 들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한때 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미래로 불렸던 프로젝트가 업황 악화와 투자 부담 앞에서 속도 조절에 나선 것이다.
특히 수천억 원이 투입되는 재활용·바이오 소재 사업은 투자 우선순위에서 밀리거나 사업성 재검토 대상에 오르는 사례가 늘고 있다. 석유화학 업계에서는 현재 석유화학 기업들의 최우선 과제가 탄소중립이 아닌 생존에 가깝다는 분석이 나온다.
역설적으로 업황이 악화될수록 친환경 전환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국제사회가 플라스틱 오염을 기후위기와 연결된 문제로 인식하면서 재생원료 사용 확대와 탄소 규제 강화에 속도를 내고 있어서다. 유럽연합(EU)을 비롯한 주요국들은 재활용 원료 사용 의무를 확대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폐플라스틱 재활용과 바이오 소재 전환은 선택이 아닌 생존 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석유화학 업계에서는 과거처럼 플라스틱 생산량을 늘려 성장하는 시대는 사실상 끝났으며, 앞으로는 친환경 기술력과 순환경제 체계를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경쟁력을 결정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주요 기업들은 범용 석유화학 제품 의존도를 낮추고 친환경·고부가가치 소재 중심으로 사업 구조를 전환하고 있다. LG화학은 폐플라스틱 재활용 소재(PCR)와 바이오 원료 사업 확대에 나서는 한편 전지소재와 반도체 패키징 소재 등 고부가 사업 육성에 집중하고 있다. 롯데케미칼 역시 2030년까지 전략소재 비중을 60% 이상으로 확대한다는 목표 아래 슈퍼엔지니어링플라스틱(EP)과 배터리 소재 등 고부가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과거 생산량 확대와 원가 경쟁력이 핵심이었다면 이제는 친환경 기술력과 고부가 소재 경쟁력이 기업의 생존을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탄소중립산업법은 업계의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법안에는 탄소중립 핵심 기술에 대한 세제 지원과 연구개발(R&D) 확대, 인허가 및 행정절차 지원 등이 담길 것으로 예상된다. 기업 입장에서는 대규모 투자 부담을 줄이면서 친환경 사업을 지속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는 셈이다.
석유화학 업계에서는 친환경 전환이 기업의 자발적 의지만으로 추진되기 어려운 단계에 들어섰다고 보고 있다. 수익성이 악화된 상황에서 친환경 전환을 지속하려면 정부 지원과 제도적 유인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폐플라스틱 재활용, 화학적 재활용, 바이오 기반 소재 등 고부가 친환경 분야는 향후 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영역으로 꼽힌다.
결국 탄소중립산업법의 성패는 단순히 친환경 투자를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공급 과잉과 저수익 구조에 갇힌 국내 석유화학 산업을 미래형 산업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