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건물을 허물고, 갈아엎고 화려하게 지으려고 한다. 동서고금 권력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위해 크고 높은 건물을 지어왔다. 민주주의가 보편화된 21세기에도 일부 권력자들은 같은 일을 벌인다. 마치 자신이 왕으로 영원히 집권할 수 있다는 것처럼.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26년 3월29일(현지시각) 미국 메릴랜드주 조인트 베이스 앤드루스로 향하는 에어포스원 기내에서 백악관 무도회장 조감도를 들어 보이며 취재진에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왼쪽).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2022년 3월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회견장에서 대통령실 용산 이전과 관련해 취재진에게 설명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부동산개발업자 출신답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동관이 좁다는 이유로 990명을 수용하는 2500평 규모의 초대형 무도회장 '스테이트 볼룸(State Ballroom)' 신축을 추진하고 있다.
백악관 동관(East Wing)은 미국의 얼굴과도 같은 공간이며 각종 국가 행사와 외교 의전이 이뤄지는 공간이다. 대통령 배우자의 집무 공간이기도 하다. 특정 대통령 개인의 사택이 아니라 미국 역사에서 여러 대통령이 활용해 온 공적 공간이다. 참고로 백악관 서관(West Wing)은 대통령 집무실과 비서진이 모여 있는 곳으로 미국 정치의 심장부가 되는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무도회장 건설 추진에 미국의 역사보존 단체들은 백악관의 주인이 아닌 잠시 머무는 관리자일뿐임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의 유산을 마음대로 파괴하려 한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이 공간을 단지 좁다는 이유로 허무는 행위는 국가 유산을 마치 개인 소유의 부동산처럼 취급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소유한 마라라고의 화려한 무도회장을 자랑해왔다. 금빛 장식과 대형 샹들리에로 채워진 그 공간은 이번 계획의 지향점을 짐작하게 한다. 공적 공간인 백악관마저 트럼프 스타일로 덮어씌우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2025년 10월22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동관(East Wing)이 무도회장 건설에 앞서 철거되고 있다. ⓒAP/연합뉴스
2026년 3월10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과거 동관이 있던 자리에서 무도회장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AP/연합뉴스
약 4억 달러(약 6100억 원)가 들어가는 스테이트 볼룸 프로젝트는 정부 예산이 아닌 민간 기부로 충당된다. 백악관은 지난해 기부자 명단을 한 차례 공개했는데, 아마존 애플 메타 등 거대 IT 기업과 억만장자들이 포함돼 논란을 낳았다. 이에 시민단체들은 기업들이 정책 혜택을 기대하고 거액을 기부한 것 아니냐는 이해충돌 문제를 제기했다. 또 기부금의 출처와 규모도 완전히 공개되지 않아 투명성에 대한 비판도 뒤따랐다.
무도회장 신축 계획은 법적 논란으로 번져갔다. 연방지방법원은 3월31일 의회의 승인 없이 역사적 건축물을 철거하고 신축하는 건 불법 소지가 있다며 공사 중단 명령을 내렸다. 트럼프 대통령 측은 항소 의사를 밝히며, 안보 시설 확충을 명분으로 지하 벙커 등 보안 시설 공사를 강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6년 3월29일(현지시각)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 원 기내에서 백악관 동관(East Wing) 신축 계획 조감도를 기자들에게 들어 보이고 있다. ⓒA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9일(현지시각) 전용기 에어포스 원에서 기자들에게 백악관 무도회장 신축 계획과 관련된 도면을 들어보이며 직접 설명에 나서기도 했다.
이를 본 독자들은 가운데 일부는 기시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멀쩡한 청와대를 비우고 용산으로 집무실을 옮겼던 대통령이 있었다. 그는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다.
국가 규모와 정치 시스템은 다르지만, 두 사람이 공간을 통해 권력을 연출하려는 방식은 빼닮아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2022년 3월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회견장에서 대통령실 용산 이전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 전 대통령의 집무실 이전이라는 선택은 결과적으로 큰 논란을 낳았다. 초기 수백억 원 수준이라던 용산 집무실 이전 비용은 국방부 이전과 보안 인프라 구축, 영빈관 신축까지 더해지며 수천억 원대로 불어났다. 군사 전문가들의 우려에도 국방부 건물을 서둘러 이전하면서 통신과 보안 시스템에 혼선이 빚어졌고, 이는 안보 문제로까지 이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 전 대통령은 소통을 강조하며 용산으로 집무실을 옮겼지만, 출근길 문답인 도어스테핑을 중단하면서 불통이라는 비판을 자초했다. 또 청와대가 아닌 한남동 관저에서 용산으로 출퇴근하는 과정에서 교통 통제로 인한 시민 불편 논란도 이어졌다.
서울 종로구 청와대. ⓒ연합뉴스
2026년 1월2일 공개된 용산 대통령실 집무실 사우나 모습. ⓒ연합뉴스
윤 전 대통령이 용산 이전을 권위주의 탈피의 상징으로 내세웠다면, 트럼프 대통령은 무도회장 신축을 국격의 표현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러나 공간의 이동이나 화려한 신축이 그들의 불통을 가려주지는 못했다.
두 사람은 기존 건물이 가진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채 결과적으로 공간을 파괴하는 선택을 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특정 공간에 집착하는 모습은 결국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쇼케이스에 가깝다. 과연 그들의 우선순위에 민생은 있었을까. 대통령은 자신만의 화려한 구중궁궐을 짓는 왕이 아니다. 국민을 위해 일하는 선출직 공무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