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고대역폭메모리(HBM)와 파운드리 부문에서 잇따라 핵심 교두보를 마련하며 전방위적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으나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노조의 집단행동이 가시화되며 경영 불확실성이 고조되고 있다. 역대 최대 규모의 인원이 참여하는 파업 전운이 감돌며 '사업 호재'와 '파업 리스크'가 충돌하는 모양새다.
이번 노조의 단체행동은 단순한 노사 갈등을 넘어 공정 중단에 따른 실질적 생산차질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위기 대응 역량이 다시금 시험대에 올랐다는 시선이 나온다. 이에 사법 리스크를 벗어난 이 회장이 마주한 핵심 과제는 '노사 관리 안정화'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연합뉴스
19일 삼성전자노동조합 임금교섭 공동투쟁본부는 자체 공지사항을 통해 파업투쟁 지침 1호로 4월23일 오후 1시 평택사업장에서 진행할 '4.23 투쟁 결의대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사항을 내걸었다. 동시에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는 별도로 이달 23일 오전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이 회장의 자택 앞에서 '무능 경영진 규탄 쟁의행위 돌입 선포 기자회견'을 연다고 밝혔다.
공동투쟁본부는 전삼노와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지부(초기업노조), 삼성전자노조 동행(동행) 등으로 공동교섭단을 구성한 뒤 지난해 말부터 3개월여 동안 사측과 교섭을 이어왔다.
중앙노동위원회 조정까지 불발된 상황에서 노조는 쟁의권을 확보하는 절차를 마무리했다. 앞서 9~18일 공동투쟁본부는 전체 조합원을 대상으로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실시했다. 재적 조합원 8만9874명 가운데 6만6019명(73.5%)이 참여해 찬성 6만1456명, 찬성률 93.1%라는 압도적 수치로 투표가 가결됐다.
공동투쟁본부는 성과급 정상화와 정당한 보상 체계 실현을 위해 흔들림 없이 나아가겠다는 결기를 보이고 있다. 노조의 임금교섭 핵심 요구사항은 성과급 산정 기준 투명화, 성과급 상한 폐지, 임금인상률 7% 등이다.
사측은 상한 안에서 초과이익성과급(OPI) 재원을 경제적부가가치(EVA) 20% 또는 영업이익 10% 가운데 선택할 수 있게 하는 방안, 임금인상률 6.2%, 자사주 20주 지급 등을 제시하고 있다.
공동투쟁본부는 "이번 찬반투표의 압도적 결과는 노동자 절대다수가 현 사측 제시안이 '인재제일' 경영원칙에 부합하지 않음을 분명히 선언한 것"이라며 "경영원칙 실현과 인재 경쟁력 향상을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조가 사측을 단계적으로 압박해 나가겠다는 방침을 세운 사이 삼성전자는 이 회장까지 직접 나서 비약적 발전을 정조준하고 있다. 치열한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경쟁력 회복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부진에 빠졌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까지 반등의 불씨를 키웠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16일(현지시각) 엔비디아 기술 콘퍼런스 GTC 2026에 참여해 HBM4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직접 '어메이징(놀라운) HBM4'라고 표현한 것이다.
전날에는 리사 수 AMD CEO의 첫 방한을 계기로 AMD의 차세대 AI 가속기에 HBM4를 우선 공급하는 업체로 선정됐다. 경쟁사에 뒤처졌던 HBM 시장에서 향후 삼성전자의 점유율 회복이 기대되는 지점이다.
지난해 수조 원대 영업손실을 낸 것으로 추정되는 파운드리 사업에서는 지난해 7월 165억4400만 달러(약 22조7천억 원) 규모의 테슬라 자율주행 칩 수주에 이어 엔비디아의 물량까지 공급하는 것이 공식화됐다.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의 AI 추론용 칩 '그록3' 언어처리장치(LPU)를 생산해 올해 3분기 출하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AMD와도 차세대 제품을 위탁 생산하는 파운드리 협력에 관해 논의해 나가기로 약속했다. 한진만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장도 올해 정기 주주총회 뒤 주주와의 대화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수율을 올려 수익성을 계속 높여나갈 것"이라며 "1~2년 정도만 참아주시면 좋은 결과를 보여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도 전날 국내외 주요 인사를 만날 때 사용하는 서울 한남동 소재 승지원에서 리사 수 CEO와 만찬 회동을 하면서 20년가량 이어지고 있는 삼성전자와 AMD의 네트워크를 다졌다.
이처럼 이 회장이 사법 리스크를 털어 내고 경영전면에 복귀해 실질적 성과를 도출하는 상황에서 내부에서는 노조의 '파업 리스크'가 코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2020년 이 회장이 '무노조 경영' 철폐를 선언한 뒤 6년 만이다.
파업의 전운이 감돌면서 이미 삼성전자 노사 관리는 앞으로 주요한 의제가 될 것으로 점쳐졌다. 이찬희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준감위) 위원장은 2월24일 4기 준감위 첫 정례회의 날 기자들과 만나 "삼성이 넘어야 할 여러 산 가운데 큰 산이 바로 노사 관계"라고 짚었다.
특히 반도체 사업의 특성을 고려하면 수만 명 규모 노조의 파업은 실적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회장의 위기 관리 리더십에 시선이 모인다.
올해 노조의 단체행동이 현실화하면 이는 삼성전자 역사상 2024년에 이어 2번째 총파업이 진행되는 것이다.
2024년 7월 전삼노가 25일 동안 진행했던 파업 때는 참여 인원이 1천 명에 미치지 못해 실제로는 생산에 차질이 빚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올해는 삼성전자 최초 단일 과반 노조인 초기업노조 출범과 더불어 공동투쟁본부 인원은 9만여 명에 이르는 등 생산에 영향이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반도체 생산라인의 일시적 가동 중단은 설비 내의 웨이퍼 폐기와 장비 재가동, 수율 회복을 위한 막대한 비용을 초래해 천문학적 손실을 낳는다. 2018년 3월 삼성전자 평택공장이 정전사고로 단 28분 동안 가동이 중단됐을 때 500억 원가량의 손실이 발생했다. 현재 노조가 5월21일부터 18일 동안의 파업을 예고한 만큼 수조 원을 웃도는 손실이 발생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삼성전자가 올해 연간 영업이익 200조 원을 바라본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작지 않은 규모인데다 반도체 사업의 글로벌 시장 신뢰의 문제도 연결된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해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DS부문) 메모리 품목 가동률은 100%이기도 하다.
전영현 DS부문 대표이사 부회장은 전날 정기 주총에서 경쟁사와 비교한 임금 경쟁력 수준, 인재유출 문제를 묻는 한 주주의 질문에 "반도체 부문의 경영성과가 저조한 시기를 겪으면서 실적과 연동되는 성과급 지급율이 낮아져서 임금 경쟁력이 낮아진 것은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다만 반도체 제품 경쟁력을 회복하면서 성과급 지급이 늘어나고 경쟁사 대비 격차도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며 "임금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해서 우수 인재를 유지하고 인력의 이탈을 방지함으로써 지속가능한 성장을 견인하도록 책임경영을 실현하겠다"고 말했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최근 메모리 생산 풀가동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공장이 수일 동안 멈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진다"며 "그 전에 노사 사이 합의점을 찾거나 사측에서 확실한 대안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회사는 2026년 임금협상을 원만하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