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장기 불황의 터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석유화학업계가 중동 전쟁이라는 대형 악재의 영향권에 본격적으로 노출되는 모양새다. LG화학과 롯데케미칼에 이어 한화솔루션 등 국내 석유화학 대표주자들이 중동발 충격에 잇따라 고객사에 공급 불확실성을 통보하면서다.
올해 정부 주도의 사업재편이 본격적으로 실행되는 해인 만큼 석유화학업계는 체질개선을 위한 ‘골든타임’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충남 대산석유화학산업단지 전경. ⓒ서산시
그러나 범용 제품의 공급과잉 해소에 나서기도 전에 터진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가 원가부담과 물류대란이라는 이중고를 안기며 업계의 자구책마저 약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13일 석유화학업계에 따르면 한화솔루션은 최근 고객사들에 공문을 통해 중동 전쟁에 따른 에너지 및 물류 환경의 불확실성 탓에 ‘불가항력(Force Majeure, 포스마주르)’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공지했다.
불가항력은 전쟁이나 천재지변 등 기업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인으로 계약 이행이 불가능해질 때 적용되는 조치를 말한다. 기업이 불가항력을 선언하면 계약을 이행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배상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다.
한화솔루션은 폴리올레핀(PO) 계열 등 일부 제품에 관해 고객사에 불가항력 가능성을 통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동 이슈를 이유로 '불가항력'을 선언한 석유화학기업은 한화솔루션이 처음이 아니다. 4일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의 합작사 여천NCC의 불가항력 선언을 시작으로 석유화학업계 1, 2위 기업인 LG화학, 롯데케미칼도 불가항력 가능성을 고객사에 공지했다. 한화솔루션의 불가항력 선언은 석유화학업계에서 4번째인 셈에다.
LG화학과 롯데케미칼, 한화솔루션 등 석유화학기업들은 당장 생산차질 등의 문제가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원료 수급의 불확실성 리스크를 사전에 안내한 것으로 파악된다.
석유화학업계는 3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업황 악화에 대응하기 위해 가동 중단 등으로 생산량을 감축해 왔다. 이 때문에 중동 전쟁에 따른 영향에 더 큰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국내에 공급되는 나프타 가운데 절반은 수입하고 절반은 국내에서 원유를 정제해 생산하고 있다. 나프타 수입 물량 가운데 절반가량이, 국내 도입 원유 가운데 70%가량이 현재 이란이 봉쇄하고 있는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들어온다.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시작된 뒤 유가뿐 아니라 나프타 가격이 급등했는데 여기에 직접적인 공급차질까지 더해지는 것이다. 블룸버그 등에 따르면 2월27일 이후 3월9일까지 6거래일 동안 나프타 가격은 톤당 637달러에서 992달러로 355달러(55.7%) 폭등했다.
올해 국내 석유화학업계는 여수, 대산, 울산에서 산업 구조개편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2월25일에는 롯데케미칼과 HD현대오일뱅크, 두 기업의 합작사인 HD현대케미칼이 참여하는 ‘사업재편 1호’ 프로젝트가 정부 승인을 완료했다. 올해 하반기부터 연산 110만 톤 규모의 나프타분해설비(NCC) 가동이 중단될 것으로 보인다.
증권업계와 석유화학업계에 따르면 에틸렌 등 범용 제품의 글로벌 공급과잉 구조는 2028년까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1호 프로젝트의 정부 승인을 계기로 신속히 후속 사업재편 그림을 완성해 향후 반등의 기반을 만들어야 할 중요한 시점으로 풀이된다.
여수에서는 LG화학과 GS칼텍스, 여천NCC, 롯데케미칼이 구조개편을 추진하고 있다. 울산에서는 에쓰오일이 SK지오센트릭 및 대한유화, 대산에서는 LG화학과 한화토탈에너지스가 사업재편에 나서고 있다.
한승재 DB증권 연구원은 “미국의 이란 공습 뒤 사실상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됐고 전쟁 뒤 유가가 급등했는데 석유제품 가격은 더 폭등했다”며 “당장 봉쇄가 풀린다 하더라도 원유 수송 정상화, 정제설비 가동률 상향, 납사 수송 재개, 화학 설비 가동률 정상화가 순차적으로 이뤄져야지만 석유화학 제품 재고가 반등할 수 있다”고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