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에너지 시장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이후 요동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뒤 새롭게 에너지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유럽은 그동안 재생에너지 확대정책을 펼쳐왔지만, 여전히 취약한 에너지 수급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유럽 에너지 시장이 이란 전쟁에 따른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요동치고 있다. 사진은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이미지를 재편집 한 것.
4일 글로벌경제 포털 인베스팅닷컴에 따르면 유럽 천연가스 가격의 기준이 되는 지표인 ICE 네덜란드 TTF 천연가스 선물가격은 3일 종가기준 1메가와트시(MWh)당 53.6유로로 미국이 이란을 공격하기 전인 지난달 27일 31.9유로/MWh와 비교해 68% 급등한 것으로 파악된다.
문제는 이와 같은 급등세가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더욱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호르무즈 해협은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을 연결하는 좁은 해역으로 전 세계 해상 원유 수송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곳이다.
골드만삭스는 호르무즈 해협이 한 달간 완전히 폐쇄될 경우, 유럽의 천연가스 가격이 74유로/MWh까지 상승할 수 있다고 바라봤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2개월 이상 지속된다면 유럽 천연가스 가격은 100유로/MWh도 넘길 수 있다고 골드만삭스는 예상했다.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가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고 유조선을 공격하면서 이와 같은 전망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다.
이란 파르스 통신을 인용한 러시아 매체 리아노보스티 통신에 따르면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모하마드 아크바르자데 해군 부사령관은 "호르무즈 해협이 안전하지 않다는 이슬람혁명수비대의 경고를 무시한 10척 이상의 유조선이 각종 미사일 공격을 받아 불에 탔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에 맞서 필요할 경우 미국 해군의 역량을 동원해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선박을 호위하겠다고 밝혔지만, 유럽을 비롯한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의 위기를 잠재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유럽이 이처럼 중동정세 변화에 타격을 입는 이유는 미약한 가스 저장량이 구조적 리스크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벨기에 경제 싱크탱크 브뤼겔의 시모네 탈리아피에트라 선임연구원은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 유럽은 아시아 에너지 구매자들과 쟁탈전을 벌여야 한다"며 "특히 2026년 초 유럽의 가스 비축량이 예년보다 훨씬 낮기 때문에 우려를 더하게 된다"고 말했다.
시모네 선임연구원에 따르면 2026년 말 기준 유럽의 가스비축량은 460억㎥(bcm)으로, 2025년 600억㎥과 2024년 770억㎥에 크게 못 미친다.
유럽연합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뒤부터 러시아산 파이프라인 가스 및 LNG 수입을 단계적으로 중단하는 규정을 만들어왔고, 올해 1월 최종 승인한 바 있다. 이와 함께 유럽은 에너지 자립도를 높이기 위해 그동안 재생에너지를 확장하는 정책을 펼쳐왔다. 하지만 여전히 글로벌 에너지 위기에 맞설 '완충재'로는 역부족인 것으로 파악된다.
유럽 환경청(EEA)에 따르면 유럽연합은 탈탄소화를 주도하면서 2024년 기준 유럽연합 전체발전량의 47%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했다. 이어 냉난방부문은 27%, 수송부문은 11% 순으로 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여왔다.
하지만 유럽 전체 최종에너지 소비기준으로 재생에너지의 비중을 살펴보면 25.4%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난방과 산업, 수송 부문에서 여전히 가스 의존도가 높아, 에너지 수급에서 충격이 발생할 경우, 현재 수준의 재생에너지 비중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이터에 따르면 유럽연합은 이란전쟁 발생 직후 가스·석유 조정그룹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회원국들에게 공급 상황 점검을 요청하면서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다.
가스·석유 조정그룹은 유럽연합 회원국 정부 대표들로 구성되며, 가스 저장량과 공급 안보를 모니터링하고 위기가 발생하면 대응조치를 조율하는 역할을 맡는 기구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현재 유럽연합의 가스 저장량이 2027년 겨울을 앞두고 재충전이 가능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불행 중 다행스러운 점은 유럽이 현재 가스 수요가 정점에 달하는 겨울철 난방시즌을 막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럽이 이번 이란 전쟁에 따른 에너지 수급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는 상황을 더 지켜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