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상황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 코스피는 5천을 훌쩍 뛰어넘어 6천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한국 자본시장도 점차 장기 투자의 가치에 눈을 뜨는 이 시기, 워런 버핏의 철학을 전면에 꺼내든 회사가 있다. 증권사도, 자산운용사도 아닌 보험사, 미래에셋생명이다.
김재식 미래에셋생명 부회장은 최근 열린 미래에셋생명 실적발표에서 “미래에셋생명만의 '한국형 버크셔 해서웨이' 모델을 완성하겠다”고 선언했다. '버크셔 해서웨이'는 워런 버핏이 60년 간 이끈 투자 회사다.
김재식 부회장의 선언은 IFRS17 도입 초기부터 고수해 온 깐깐한 자산부채관리(ALM)와 170%를 상회하는 압도적인 자본 건전성을 무기 삼아, 회사 자기자본(PI)을 유망 기업에 장기 투자하겠다는 구상을 담고 있다. 거대한 저수지의 안정적인 수압을 이용해 성장의 터빈을 돌리는 '자본의 선순환' 모델이다.
그런데 이 장밋빛 청사진에서 한 가지 씁쓸한 대목이 눈에 띈다. 김 부회장이 장기 투자의 무대로 지목한 곳이 국내가 아닌 '글로벌'이라는 점이다. 그는 "미래에셋그룹의 글로벌 인프라를 적극 활용해 미래 기술 분야의 혁신 기업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한국형' 버크셔를 표방하면서도 정작 복리의 마법을 펼칠 무대로는 바다 건너를 바라보는 역설. 이는 지금까지 우리 자본시장이 긴 호흡의 투자자들에게 얼마나 매력 없는 시장이었는지를 뼈아프게 방증한다.
버핏의 핵심 성공 방정식은 시장에서 우량 기업을 찾아내어 흔들림 없이 투자하는 뚝심에 있다. 하지만 당장의 분기 실적과 테마주 쫓기에 골몰해 온 척박한 국내 환경, 그리고 주주환원에 인색했던 기업들의 태도 앞에서는 그 위대한 복리의 마법도 제대로 작동할 리 만무했다. 인내심을 가진 거대 자본이 한국 시장을 외면하고 글로벌 혁신 기업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20년 전 제시됐지만 시대를 만나지 못했던 박현주 회장의 '한국형 버크셔' 구상이 이제 막 튼튼한 뼈대를 입고 본격화되고 있다. 조급증을 버리고 묵묵한 장기 투자를 선언한 미래에셋생명의 과감한 실험은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들의 도약이 진정 한국 자본시장의 축복이 되려면, 코스피 6천 시대를 목전에 둔 우리 시장 스스로가 변해야 한다.
워런 버핏의 진정한 위대함은 좋은 주식을 고른 안목이 아니라, 시장의 폭락과 환희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시간의 인내'에 있다. 코스피 6천을 목전에 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엑시트 버튼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시장의 조급증 앞에서는 그 위대한 복리의 마법도 작동할 수 없다.
인내심 있는 자본이 안심하고 머물며 기업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토양, 묵묵한 장기투자가 시장의 새로운 기준으로 대우받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제2, 제3의 한국형 버크셔 해서웨이가 글로벌 시장이 아닌 우리의 안뜰에서 복리의 마법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기업을 발견하고, 투자하고, 과실을 기다린다. 이 과정이 진정한 투자 공식으로 자리 잡는 한국 자본시장의 내일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