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동안 쿠팡에 유리하게 작동해온 ‘배송 경쟁의 판’이 흔들리고 있다. 대형마트의 심야·새벽 배송 규제 완화가 현실화하면서 쿠팡이 주도해온 이커머스 배송 시장의 독점 구도에 균열이 생길 가능성이 생겼다. 때를 맞춰 네이버도 마켓컬리와의 제휴 플랫폼을 통해 '당일배송'을 시작했다. 다시, 배송 전쟁 조짐이다.
김민석 국무총리가 8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열린 고위당정협의회에서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대형마트의 온라인 배송 규제를 합리화하기 위한 유통산업발전법 개정과 관련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9일 업계에 따르면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서울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에서 고위 당정협의회를 열고 2012년부터 유지해온 대형마트의 새벽배송 제한 규제를 풀기로 합의했다. 이러한 방향에 맞춰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을 추진한다.
박수현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은 브리핑에서 “급변한 유통 환경에 맞춰 오프라인 중심의 규제 체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데 당정이 의견을 모았다”고 설명했다. 유통 중심이 온라인으로 이동한 상황에서 대형마트의 온라인 영업을 제한하는 규제가 더 이상 중소 유통 보호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개정안의 핵심은 대규모 점포의 영업시간 제한 규정에 ‘전자상거래를 위한 영업 행위에는 이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예외 단서를 신설하는 것이다.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대형마트와 기업형슈퍼마켓(SSM)은 심야 시간이나 새벽 시간에도 온라인 주문 상품을 포장·반출·배송할 수 있게 된다. 점포의 불이 꺼지는 시간이 곧바로 배송의 한계가 됐던 구조가 깨지는 셈이다.
제도 변화 가능성이 커지자 경쟁사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네이버와 마켓컬리가 함께 운영하는 ‘컬리N마트’는 이날부터 당일배송 서비스를 시작했다. 전날 오후 11시부터 당일 오후 3시까지 주문한 상품을 자정 전에 배송하는 이른바 ‘자정 샛별배송’이다. 기존 새벽배송에 당일배송까지 얹으며 배송 속도 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네이버의 플랫폼 트래픽과 결제 인프라에 컬리의 신선식품 운영 노하우와 새벽배송 시스템이 결합되면서 배송 속도는 빨라지고 취급 범위도 넓어졌다. 신선식품 중심이던 컬리의 강점에 네이버의 대중적 상품 접근성이 더해지면서 쿠팡 외에도 빠른 배송을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 늘었다.
이와 함께 네이버의 물류 협력 전략도 규제 완화라는 환경 변화 속에서 경쟁력이 한층 강화될 수 있다. 네이버는 이미 스마트스토어와 네이버페이를 축으로 CJ대한통운, 신세계그룹 등 물류·유통 강자들과의 협업을 강화하며 물류 역량 보완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대형마트와 SSM의 심야·새벽 물류 활용이 가능해지면 네이버는 이미 연결돼 있는 유통 파트너들의 오프라인 자산을 곧바로 배송 경쟁력으로 전환할 수 있다.
네이버와 함께 대형마트를 중심으로 이번 규제 완화의 최대 수혜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대형마트는 새로운 상품을 늘리는 싸움을 할 필요 없이 이미 갖고 있던 상품을 배송 경쟁의 무기로 전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매장에 진열돼 있던 수십만 개의 생활용품과 식품 등이 심야시간에도 포장·출고가 가능해지면 대규모 물류센터 투자 없이도 점포 자체가 하나의 물류 거점으로 기능하게 되는 셈이다.
특히 대형마트는 생필품과 신선식품 비중이 높고 소비자가 반복적으로 구매하는 상품 구성이 탄탄하다. 이런 핵심 상품들이 새벽이나 심야 배송으로 연결되면 굳이 쿠팡이 아니어도 되는 선택지가 더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상품관리단위(SKU) 총량 경쟁이 아니라 장바구니에 자주 담기는 상품을 얼마나 빠르게 배송하느냐의 싸움이 될 수 있다.
여기에 직매입 구조에서 나오는 규모의 경제가 더해지면서 가격 경쟁력까지 확보할 수 있다. 대형마트는 제조사와의 대량 직거래를 통해 상품을 직접 매입하는 구조인 만큼 중간 유통 단계를 줄여 원가를 낮출 수 있다. 여기에 전국 점포를 활용한 배송 체계가 구축될 경우 별도의 대형 물류센터를 추가로 짓지 않아도 돼 물류 투자 부담을 줄이고 배송 비용을 보다 유연하게 관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