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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과서 논쟁을 일으킨(?) 어느 외국인
ⓒANSA

날이 갈수록 격화되어 가는 것 같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관련 논란들을 지켜보다 보니까, 어쩌면 현행 검인정 국사교과서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이른바 민주개혁세력들과, 지금의 검인정 국사교과서들은 문제가 많으니 이를 국정교과서로 바꾸자는 우파진영 모두 실은 약 80년쯤 전에 세상을 떠난 어느 서양 사상가의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해답에 영향을 받아 이렇게 결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들어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풀어볼까 한다.

안토니오 그람시라는 이태리의 사회주의자가 있었다. 그의 고민은 러시아에서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이 왜 서유럽에서는 실패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인 마르크스의 이론에 의하면 사회주의 혁명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서유럽에서 먼저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서유럽 국가들에서의 자본주의 타도 시도는 그람시가 활동하던 20세기 전반에는 족족 실패했고, 오히려 자본주의 후진국인 러시아에서 성공했다. 어째서 그가 신봉했던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과는 정반대되는 그런 일들이 벌어졌을까? 사회주의자 그람시는 이런 고민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안토니오 그람시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기도 하지만 현실 정치에 깊숙히 발을 담그고 있는 정치가이기에 원래대로라면 그람시에게 이런 문제를 찬찬히 살펴 보고 해답을 생각해 낼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그람시에게 기회(?)가 왔다. 이태리의 국회의원이었던 그람시는 당시 이태리의 파시스트 독재자인 무솔리니를 의회에서 통렬하게 비판했고 그 때문에 무솔리니의 노여움을 사서 감옥에 갇힌다.

현실 정치인으로 계속 바쁘게 지냈더라면 도저히 시간이 없었을 안토니오 그람시는 역설적으로 감옥에서 시간이 나서 그가 고민해 왔던, 어째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혁명이론과는 달리 고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혁명이 안 일어났냐는 문제를 천착할 시간을 얻게 되었다. 그람시는 옥중에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정리해 글을 썼다. 그러나 파시스트 독재자 무솔리니의 감옥에서 독재자에 반대해 옥에 갇힌 그람시가 쓴 글이니 이를 간수들이 샅샅이 검열하였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런 검열을 피하려고 그람시는 감옥 안에서 암호 같은 상징을 섞어가며 글을 썼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람시는 독재자 무솔리니가 쫓겨나서 애인과 함께 처형되어 그들의 시체들이 그에게 핍박받던 사람들 앞에서 정육점 고기처럼 매달린 것도(혐짤주의) 보지 못하고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람시가 남긴 글들은, 감옥 속에서 간수의 감시를 피해, 절치부심하며 그가 정치적 승리의 길을 찾아가며 고민했던 글들은, [옥중수고(獄中手稿)]란 이름으로 정리되어 햇볕을 보게 되었다. 그람시는 자신의 유작(遺作)인 이 [옥중수고]에서 그의 평생의 궁금증이었던, 어째서 서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은 실패했는가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다. 하긴 그 해답을 좀 더 일찍 얻었다면 그람시는 감옥에도 가지 않고 목숨도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_-

그람시의 해답은 (거칠게 요약하자면) 바로 서유럽의 당시 지배계급(부르주아)은 단순히 경제력과 정치권력만을 조야(粗野)하게 행사해서 피지배계급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바로 문화적 헤게모니까지 이용해서 중층적으로 지배하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문화적으로 홀린 피지배계급은 감히 혁명을 일으킬 생각도 못하고, 아니 아예 자발적으로 혁명을 막는 일에 나서기까지 했기에 서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즉 서유럽에서 좌익은 문화전쟁, 역사전쟁, 교육전쟁에서 우파한테 지고 들어갔기에 정치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람시의 주장이라고나 할까.

우스갯소리지만, 이는 언젠가 정운영 선생님께서 칼럼에서 쓰신, 이태리 가톨릭 교회를 빗대어 이야기 한 다음과 같이 '공산당이 절대로 교회를 이기지 못하는 이유'란 얘기에 나름 집약되어 있다. 그 얘기에 따르면 가톨릭 교회는 매주 전당대회를 하고(주일 미사), 당원(신자)들한테 그때마다 당비(헌금)를 걷고, 늘 자아비판(고해성사)을 하게 하니(응?) 어찌 공산당이 교회를 이길 수 있겠느냐는 것.

이렇게 종교가 백성들을 교화하고(그러기에 마르크스도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 함) 학교에서는 국가관을 주입하고, 문화예술로 피지배계층의 지친 심신을 달래니 어찌 이런 우파의, 참호를 파고 진득하게 진행하는 진지전을 그저 정치 권력만 탈취하려고 한탕 요행수만 노리는 좌익의 전략(기동전)이 이길 수 있겠느냐는 것. 그러기에 그람시는 서유럽에서 사회주의가 이기려면 좌파가 문화전쟁에서부터 승리해야 한다고 주장한 셈이다. 먼저 학교에서, 교회에서, 영화판에서, 연극무대에서, 음악계에서, 문단에서 좌익이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해야 그 다음에 정치적 헤게모니를 바라 볼 수 있다는 게 그람시가 자신의 목숨과 바꾸어 남긴 유고 [옥중수고]의 결론이라고나 할까.

그람시는 세상을 떠났지만, 서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그람시가 유언처럼 남긴 이 교훈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전부 아니면 전무(全無)라는 혁명론을 버리고 유로 코뮤니즘이라 불리는 정치적 포지션을 취해 의회에 진출했고, 그람시의 조국인 이태리 공산당은 아예 공산당이란 이름까지 버리고 내각에 참여하기까지 한다. 그 와중에 그람시의 가르침처럼 끊임없이 문화예술계에 영향력을 넓히려고 애쓴 것은 물론이었고. 우리나라 역시 그람시의 이런 헤게모니론, 진지전과 기동전 개념이 이른바 진보세력들에게 낯선 것은 아니었고 1970년대 이후 운동권들이 꾸준히 이에 따라 역사/문화/예술계에 세력을 넓혀 그 쪽에서는 어느덧 다수가 되었다.

세상일에는 무릇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고, 사람들은 어떤 일을 겪으면 학습효과라는 것이 생기기 마련. 우리나라는 보수세력이 1997년부터 10년간 소위 민주개혁세력의 이런 진지전에 패해 결국 정권까지 잃었다고 여겼고, 그러니 그람시가 절치부심했듯이 이제 역사 교과서 문제 같은 것에서 자신들이 진지전을 벌이겠다는 다짐에서 시작한 것이 이번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아닐까 싶다. 반대진영도 역시 여기서부터 밀리면 결국 정권을 다시 못 되찾는다는 절박감에서 이런 역사전쟁이 더욱 가열차게 전개되는 것 같다는 느낌적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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