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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마을을 만들어 달라. 학교가 함께 하겠다
ⓒKohnoLynn via Getty Images

권재원 (성원중 교사/ 실천교육 교사모임 고문)

'나 홀로 볼링'으로 유명한 로버트 퍼트남의 최근작 '우리 아이들'은 계층간 격차가 지역으로 분할되어버린 미국의 우울한 상황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미국에서는 소득 계층에 따라 서로 다른 '마을'을 이루는 현상이 심화되었고, 그 결과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이 모두 한 마을의 구성원으로 지역사회를 이루던 미국의 전통이 무너졌다. 이는 가난한 계층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 외에 여러 문화자본, 사회자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육적 혜택을 박탈당했다는 뜻이다. 퍼트넘은 부유한 지역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시설과 교사진을 갖춘 빈곤지역 학교의 학생들이 부유층 지역 학교 학생들보다 학업성취, 진로의식, 자기관리능력 등이 현저하게 뒤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제 창의적 역량의 시대가 왔다고 하는데, 이미 그 역량에서부터 계층간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퍼트남에 따르면 이러한 격차는 문화자본과 관계자본의 격차 때문에 발생한다. 이미 수십 년 전 제임스 콜먼의 연구와 덩컨과 블라우의 연구를 통해 학생들의 학업성취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는 부모가 돈을 들여 사교육을 시키기 때문이 아니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을 경우 학생들은 부모와 높은 수준의 상호작용을 하면서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고 문화적 소양을 키운다. 또 부모의 지인이나 친척들 역시 그 정도 수준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여러 어른들의 긍정적인 영향력을 자기 것으로 흡수할 수 있다.

한 마을에 여러 계층들이 함께 살던 시절에는 빈곤층이나 취약계층 자녀에게도 부유층 자녀만큼은 아니겠지만, 이러한 문화자본과 관계자본을 공유할 기회가 있었다. 우연히 자기 재능과 꿈에 맞는 전문가가 이웃에 살고 있을 수도 있고, 지역사회가 보유하고 있는 여러 문화예술 시설을 부유층과 함께 이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거주 지역이 분할되면서, 빈곤층이나 취약계층 자녀는 이 기회마저 잃어버렸다.

지식과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시설이나 업소들은 이용자들이 많은 지역, 즉 부유층 거주지역으로 옮겨갔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 역시 부유층 거주지역으로 옮겨갔다. 빈곤, 취약계층 거주지역에는 불완전 고용, 장시간 노동, 그리고 삶의 무게에 지친 사람들만 남았다. 그들은 학생들의 학업에 도움이 될만한 지적인 자극과 동기를 제공하기 어렵다. 심지어 가장 기본적인 친밀관계를 유지할 시간과 여력도 부족하다. 결국 아이들은 방치되거나 또래집단의 하위문화, 싸구려 대중문화에 매몰된다. 이런 아이들을 교사의 노력만으로 바로잡기란 매우 어렵다.

그런데 미국인인 퍼트넘에게는 낯설지 몰라도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는 진행형을 넘어 완료형이다. 주소만 보면 그 사람이 어느 정도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계층에 따른 지역 분할이 공고화된 나라 아닌가? 심지어 비슷한 계층간에도 지역별 선을 긋는다. 같은 강남구인데도 압구정동 아파트 주민들이 다른 아파트 주민들을 차별하고, 잠실 학부모들이 같은 송파구의 다른 지역 학생들과 같은 학교에 그들의 자녀를 배정했다고 교육청에 떼로 몰려가서 항의하는 일이 어색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는 빈곤층의 자녀는 물론 부유층의 자녀 역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 어렵다. 부유층 자녀는 부모와 지역사회로부터 긍정적인 지적, 문화적 자극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계층에 대한 경멸, 그리고 같은 계층에 대한 경쟁심을 주입받는다. 부유층과 빈곤층 지역 간의 교육환경은 도서관이나 문화예술 인프라가 아니라 입시학원의 밀도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부유층의 부모와 자녀 역시 야근과 학원 때문에 상호작용이 부족하긴 마찬가지이니 이웃과 지역사회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사실상 우리나라에는 퍼트남이 우려하는 분할된 마을조차 없다. 아예 마을이 없다.

최근 진보교육감들을 중심으로 마을 결합형 학교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설명을 들어보면 학교가 모든 것을 하는 시대는 지났으니 마을과 결합하여 공동으로 학생을 교육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계층별로 분할되고, 그나마 사실상 해체되어 있는 마을에 학교가 결합하여 받을 수 있는 도움이 대체 뭔지, 그런 마을이 학교가 하지 못하는 어떤 부분을 채워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 다른 계층에 대한 경멸과 배제, 그리고 서로간의 경쟁으로 혈안이 된 마을에 학교가 결합할 수 있을까? 불안한 고용과 고단한 삶에 허덕이며, 전입 전출이 빈번한 마을에 학교가 결합할 수 있을까? 물론 마을이 있다면, 그리고 그 마을이 퍼트넘이 기억하던 과거의 그 마을이라면 이른바 마을 결합형 학교는 매우 이상적인 학교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목가적인 풍경을 지금 우리나라 인구의 대다수가 거주하고 있는 수도권과 대도시에서 구현할 수 있을까?

오히려 순서를 바꾸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실 마을이라는 토양이 없는 아이들은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하는 묘목처럼 위태롭다. 이 아이들의 튼튼한 성장을 위해서라도 온전한 마을의 복원은 중요하다. 이 때 학교가 마을의 복원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되어줄 수 있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고 가능한 것은 마을 결합형 학교가 아니라 학교 결합형 마을이다. 물론 여건이 되는 마을에서는 마을 결합형 학교가 가능하겠지만,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학교 결합형 마을, 아니 그 이전에 학부모가 갑질이나 치맛바람이 아니라 공동의 교육적 책임을 가지고 학교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적 물적 지원이 필요하다. 벌써부터 마을 결합형 학교를 운운하는 공문이 지금도 날아오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먼저 마을을 만들어 달라. 그럼 기꺼이 학교가 결합하겠다. 만약 마을이 없다면, 학교는 마을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겠다.

먼저 마을을 만들어 달라. 학교가 함께 하겠다

* 이 글은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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