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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관계’를 원한다면 순두부를 먹자고 묻지 말 것
ⓒkuppa_rock via Getty Images
‘깊은 관계’를 원한다면 순두부를 먹자고 묻지 말 것
ⓒhuffpost

1990년대에 왕성하게 활동하던 스코틀랜드 밴드 ‘틴에이지 팬클럽’의 ‘니어 유’(Near You)라는 노래에는 인간관계에 대한 뜻깊은 성찰이 등장한다. “난 너에게로 다가갈 순 있지만 가 닿을 순 없어”(I get near you but I never seem to reach you). 소통의 한계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이 말은 얼마나 명확하고 아름다운가. 몇 달 전 서울 용산의 한 대형 마트에서 이 문장의 참됨을 재차 확인했다. 아내와 장을 보다 마침 행사 중인 순두부가 눈에 띄었다. 두 봉을 사면 찌개 양념을 준다. 옆에선 바지락을 한 근에 4000원 특가로 팔고 있었다. 한 근을 사서 반은 찌개에 넣고 반은 다음날 봉골레 파스타를 해 먹으면 딱 맞았다. 그러나 아내에게 “오늘 저녁은 순두부찌개 어때?”라고 물었다가 혼이 났다. 아내에게 “순두부 싫어한다고 여러 번 얘기를 했는데도 꼭 이렇게 한 번씩 잊어버리고 순두부 먹자는 소리를 한다”고 핀잔을 들었다. 내 머릿속 세포들이 그제야 움직였다. 영화 <말아톤>의 초원이가 역주의 순간에 “초원이 다리는 백만불짜리 다리”라고 뇌까리듯 나지막하게 외쳤다. “우리 아내가 싫어하는 음식은 감자탕, 순두부찌개, 동태찌개. 크리스마스와 밸런타인데이에는 형광등 조명이 없고 와인 리스트가 있는 식당으로 예약해 둘 것.”

‘테드’의 강연자로 유명한 미국의 발달심리학자 앨리슨 고프닉과 아들의 일화는 자기중심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루는 고프닉이 유아기의 아들을 데리고 몇몇 어른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아이는 디저트를 기다렸다. 키르쉬(체리로 만든 술)를 묻힌 파인애플이 나왔다. 아이는 파인애플을 입에 넣었다가 웩, 하고 뱉어냈다. 아마 술의 쓴맛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른 어른들을 살펴봤다. 어른들은 파인애플을 맛있게 입에 넣고 있었다. 며칠 후 아이는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이치를 발견하기라도 한 듯 고프닉에게 외쳤다. “나한테 파인애플은 ‘웩’이지만, 어른들은 파인애플을 좋아해!” 다른 사람과 자신이 다르다는 걸 깨닫는 유레카의 순간이다. 아직 두 살이 안 된 아이 앞에 초콜릿 쿠키와 삶은 브로콜리를 올려두고 “둘 중 하나만 엄마한테 줄래?”라고 하면 아이는 십중팔구 초콜릿 쿠키를 집어준다고 한다. 예전에 먹어봤는데, 맛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지금 다이어트 중이라 초콜릿 쿠키는 입에도 대지 않을 거라거나 브로콜리를 더 좋아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도 못한다. 특가 세일에 눈이 멀어 아내가 순두부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던 아저씨도 비슷하다.

세상에는 진지하고 깊은 관계가 있다. 내 경우를 예로 들자면 결혼이 그렇다. 평생의 약속 위에서 “난 너에게로 다가갈 순 있지만 가 닿을 순 없어”라는 말은 얕은 변명이다. 그러나 “너에게 가 닿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갈 거야”라고 말을 바꾸면 좀 달라진다. 창피하지만, 워낙 자기중심적인 인간으로 살아온 터라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천천히 바꾸고 있다. 머릿속에 순두부 필터와 동태찌개의 알고리즘을 단단하게 장착시키고.

넷플릭스의 드라마 <코민스키 메소드>의 주제 중 하나는 아내와의 사별을 받아들이는 노년 남성의 투쟁이다. 극 중에서 노먼 뉴랜더(앨런 아킨 분)는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줄곧 아내의 환영과 대화를 나눈다. 예전 같으면 “죽은 아내의 환영과 대화를 나눈다고? 너무 진부하고 게으른 연출 방식”이라고 딱 잘라 말했겠지만, 이제는 완벽하게 이해한다. 아내와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누거나 여행을 다녀오면, 내 안에 있는 아내의 ‘형상’이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는 인공지능처럼 성장하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알파고가 이세돌의 기보를 익히며 기풍을 파악하듯이, 작은 정보들이 쌓이고 쌓여 내 안에 있는 아내의 ‘형상’을 점점 더 실재에 가깝게 만든다. 결혼할 때는 그 형상이 30년도 더 지난 게임 <슈퍼마리오>의 피치 공주님 정도의 엉성한 수준이었지만, 이제는 월트디즈니의 1995년 작품 <포카혼타스> 정도로 정교하게 발전했다. 40년의 결혼 생활을 겪은 부부라면 아마 아바타의 컴퓨터 그래픽보다 더 정교한 배우자의 상을 각자의 마음속에 가지게 되지 않을까?
발달 심리학에 따르면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 중 타인에 대한 ‘상’을 만들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타인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예측할 수 있게 되는 시기가 있다고 한다. 대략 7~8살쯤이다. 생각해보니 올해로 같이 산지 딱 일곱 해가 됐다. 그 정도 시간이 지나고야 깨달았다. 진지하고 깊은 관계를 맺고 싶다면 상대의 형상을 열심히 마음에 그릴 것. 절대 오늘 저녁에 순두부찌개는 어떠냐는 질문을 하지 않는 그날까지. 이게 결혼이라는 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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