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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known man in white shirt holding condom in hand, closeup.
Unknown man in white shirt holding condom in hand, closeup. ⓒPaulBiryukov via Getty Images

[ESC] 너 어디까지 해봤어?

그는 성관계 도중 충동적으로 콘돔을 빼버릴 때가 많았다. 혹여나 임신이 되더라도 “결혼하면 그만”이라는 식이었다. 송지수(가명·32)씨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에 동의한다고 해서, 출산과 육아라는 ‘옵션’까지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일주일째 생리를 하지 않던 어느 날, 송씨가 임신중절(낙태) 수술의 가능성을 거론한 뒤였다. ‘살인’을 운운하는 비난과 함께, ‘결혼으로 책임’진다는데 뭐가 문제냐는 질타가 날아왔다. 그가 싸늘한 표정으로 일갈했다. “난 이기적인 여자는 질색이야.”

그 후로도 그는 비슷한 화제가 나올 때마다 송씨를 ‘이기적인 여자’라고 몰아세웠다. 그가 보기에 낙태를 옹호하거나 출산을 거부하는 건 이기적인 여자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송씨는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었지만 대꾸를 할 수도,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오히려 그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신이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자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피임약을 먹을 때조차 죄책감을 느꼈어요. 남자친구 모르게 먹었거든요. 임신과 출산을 꺼린다고 미움을 받느니 몰래 먹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40년 전, 영국 런던에서 공연된 <가스등>이라는 연극이 있었다. 대략의 내용은 이렇다. 남편은 집안의 가스등을 일부러 어둡게 만들고는 집안이 어두워졌다고 말하는 아내에게 “아냐. 당신이 잘못 본 거야”라며 아내를 탓한다. 아내의 유산을 가로채려는 남편의 책략이었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아내는 자기 자신을 점점 불신하게 된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은 여기서 유래한 심리학 용어다. 정신적 학대의 일종으로,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를 뜻한다. 대체로 친구나 가족, 배우자, 연인처럼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데, 피해자의 공감능력이나 동정심, 온순한 성품 등이 악용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했을 뿐인데 가스라이팅에 휘말리는 사례도 흔하다.

송씨의 경우가 그랬다. 그들의 관계는 처음부터 공평하지 않았다. 송씨가 대학원에서 만난 그를 ‘쫓아다녔기 때문에’ 애정의 무게추가 명백히 기울어져 있었다. 아쉬운 사람은 당연히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었고, 송씨는 그가 바라는 것은 뭐든 해주려 애썼다. 옷차림과 피부 상태를 넘나드는 ‘지적질’도 새겨들었으며, 의견이 갈릴 때면 그의 비위를 맞추느라 자신의 생각 따윈 알아서 굽혔다. 그야말로 ‘입안의 혀’처럼 굴었다고 할까. “제가 목매는 사람과 사귄 건 처음이다 보니 ‘착한 여자 콤플렉스’가 강하게 작동했던 것 같아요.”

남친은 콘돔을 뺀 뒤 임신하면 결혼하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라고 말했다

미국 심리상담사 로빈 스턴의 저서 '가스등 이펙트'에 따르면 가스라이팅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는 것은 피해자가 그의 말을 믿고 잘 보이려 노력할 때부터다. 신뢰와 호의를 어이없게도 폭력과 학대로 되돌려주는 셈이다. 이때 괴롭히려는 의도가 실제로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타인을 통제하고 지배하려 든다면 그 사람이 바로 정신적 학대의 가해자, ‘가스라이터’다. 성희롱·성추행 가해자들이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해봤자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스라이팅에 노출된 피해자는 갈수록 자기 자신의 판단력과 인지능력, 현실감각 등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면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정말 내가 이상한 건가?’ ‘내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닌가?’ ‘아무래도 내가 잘못한 것 같은데.’ 이런 상황은 가해자에 대한 의존도를 한층 더 높이기도 하며, 당연히 학대관계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더욱더 요원해진다. 궁극적으로 피해자는 자존감을 상실한 채 ‘가해자 시각’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자책감과 죄의식의 늪으로 빠져들기 일쑤다.

송씨의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 그 남자의 사랑과 인정을 구하려던 송씨의 눈물겨운 노력은 쌀 한 톨만큼의 수확이라도 있었을까? 아니다. 2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했지만, 그의 ‘지적질’과 ‘세뇌’는 수그러들 줄 몰랐다. “스키니진 입으면 살쪄 보여.” “모르면 좀 가만히 있어.” “나니까 널 좋아하지 누가 또 좋아하겠어?”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송씨의 마음속에 떠오른 것은 초라하고 멍청하고 보잘것없는 자아상이었다. ‘가해자 시각’에서 바라본 자기 자신이었다.

데이트폭력이나 가정폭력 가해자가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것 역시 가스라이팅에 속한다. “왜 날 자꾸 자극하는 거야?” “그러니까 날 좀 화나게 만들지 말랬잖아!”

박정민(가명·29)씨는 연인과 다툴 때마다 이런 말을 들었다. 다툼의 원인은 항상 박씨에게 있었다. 박씨가 그를 소리 지르게 만든 게 잘못이었고, 밤 11시까지 귀가하라는 그의 말을 듣지 않은 게 잘못이었고, 박씨를 걱정하는 그의 마음을 몰라주는 게 잘못이었다. 이유가 뭐였건 다툼은 언제나 박씨의 사과로 끝났다. 쌍욕을 들은 박씨는 데이트폭력에 완전히 노출된 상태였던 것이다.

사회적 차원에서의 가스라이팅도 있다. 다름 아닌 한국 사회에 만연한 ‘피해자 비난 문화’다. 데이트폭력이나 가정폭력의 가해자가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직까지도 사회 전반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이런 시선을 보낸다.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왜 그 시간까지 술을 마셨지?’ ‘옷은 또 왜 그렇게 입었고?’ ‘싫으면 거기서 죽어라 저항했어야지!’ 위로나 지지를 받기는커녕 피해자를 탓하는 ‘2차 가해’ 분위기에 그들은 만신창이가 된 채 스스로 의심하기에 이른다.

한국여성의전화 송란희 사무처장은 “폭력 중에 가장 그악하고 남들한테 들킬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신체적 폭력이라면, 그걸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은밀한 방식으로 진행된다”며 “그중 대표적인 것이 통제행위”라고 말했다. 또 “이 통제행위가 사회적 통념이나 고정된 성 역할과 결합할 때 정서적 폭력이 일어나며, 통제행위와 정서적 폭력의 목적은 상대방을 평가하고 조정해 자신의 입맛대로 길들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송지수씨가 더 늦기 전에 그 남자로부터 헤어 나온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유착이 깊어진 상황에서 피해자가 자신이 피해자임을 자각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되도록 수월하게 통제하기 위해 피해자의 친구나 가족을 폄하하거나 못 만나게 하는 등 피해자를 사회적·심리적으로 고립시키는 경향이 있다. 만약 지인이 학대를 당하고 있다면? 간단하다. ‘조용한 오지랖’이 답이다. 끝까지 친구로 남겠다는 각오로 당사자의 말을 최대한 들어주되, 피해자건 가해자건 쉽게 비난해서는 안 된다.

송지수씨에게도 항상 그의 옆을 지켜준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송씨의 죽 끓는 듯한 변덕에도 진심 어린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 덕분에 송씨는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제는 만나면 말할 수 있어요. 이기적인 인간은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라고요. 동의 없는 ‘노콘’(콘돔 없는 성관계)을 일삼고, 타인의 고통에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었던 당신이야말로 최고로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남친은 콘돔을 뺀 뒤 임신하면 결혼하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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