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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수사하라
ⓒ연합뉴스

최순실 게이트로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3년8개월 만에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다. 국민은 평범한 강남 아줌마 한 사람에게 휘둘려 국가의 공적인 시스템을 붕괴시킨 박 대통령이 권력을 내려놓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국민과 소통하는 대신 비선과 상대한 결과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은 "우리가 낸 세금이 복채가 됐다"고 분노했다.

다급해진 대통령은 국정 농단에 연루된 혐의를 받는 청와대 참모들을 내쫓았고, 숨어 있던 비선 인물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한꺼번에 검찰청사에 걸어 들어오고 있다. 하지만 "죽을죄를 지었다"던 최순실은 진실을 털어놓을 생각이 하나도 없다. 청와대는 영풍문 앞에 선 부장검사와 검찰 수사관들의 압수수색을 연이틀 거부했다. 비선 일당을 비호한 수석비서관은 대포폰으로 입막음을 시도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장면들이다.

이런 수상한 흐름은 최악의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은 냉정해져야 한다. 최순실 게이트의 출발점과 종착역은 대통령 자신이다.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모든 것을 고백하고 어떤 형식으로든 철저한 수사를 받겠다고 해야 한다. 그래야 비선 패거리도 체념하고 수사에 협조하게 된다. 하야나 탄핵 대신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하고 권력의 2선으로 물러나는 순조로운 퇴로도 열린다. 진상을 밝히지도 않으면서 사태를 수습하자는 건 진실을 봉인(封印)하겠다는 사술(詐術)이다. 사인(私人)인 최순실이 청와대를 제집 드나들듯이 했는지, 대통령을 등에 업고 국가 기밀을 빼내 정부 예산을 멋대로 주무르고 기업의 돈을 뜯은 것이 사실이었는지, 청와대와 정부의 누가 협조했는지를 밝히기 전에는 어떤 해결도 불가능하다.

'박근혜'는 도덕적 권위와 정당성을 상실했고, 직무 수행 능력도 불신받고 있다. 하지만 국민이 신성한 투표 행위를 통해 맡긴 대통령직(presidency)의 가치는 여전히 소중하다. 따라서 개인 박근혜와 대통령직을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박근혜'는 만신창이가 됐지만 그가 수행하고 있는 대통령직의 가치를 회복할 기회는 남아 있다.

그는 3년8개월 전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헌법 69조)고 했다. 대통령은 헌법의 수호자(66조 2항)인 것이다. 대통령이 보호해야 할 국민의 핵심적 권리는 주권(1조 2항), 존엄권과 행복추구권(10조), 평등권(11조 1항)이다.

그런데 지금 드러나고 있는 국기 문란과 국정 농단은 국민의 주권과 존엄권, 행복추구권, 평등권을 한꺼번에 침해하고 있다. 그리고 사태의 한복판에는 대통령이 있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수사에 응해 자신과 관련된 전모를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한다. 그래야 진상이 드러나고, 관련자가 처벌받고, 붕괴됐던 국정 운영 시스템이 정상화될 수 있다. 그것이 부당하게 비선으로 넘어갔던 국민의 주권을 되찾아오고, 훼손당한 존엄권과 행복추구권을 되살리고, 차별적 특권으로부터 평등권을 회복하는 단 하나뿐인 길이다. 만일 박 대통령이 힘겨운 고백의 과정을 통해 국정 농단의 실체를 밝히고 전복된 헌법적 가치를 복구한다면 대통령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다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대통령직의 가치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지금 대통령은 고립무원이다. 그 많은 친박이 완장을 차고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진심으로 대통령을 위해 최순실 국정 농단의 폐해를 직언한 사람은 없었다. 오죽하면 전여옥 전 의원이 "약점 있는 대통령이라면 더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했을까. '친박' 완장으로도 성에 안 차 '진박 감별사'라고 큰소리치면서 자리를 나눠 갖고 정치와 경제를 막장으로 몰아넣은 환관들의 실체다. 대통령이 이들의 감언이설에 흔들리면 다수 국민의 목소리가 안 들릴 수 있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는 문화일보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에게 "어렵더라도 진실을 밝혀야 출구를 찾을 수 있다"고 충고했다. 닉슨이 하야한 것은 도청 자체가 아니라 거짓말의 유혹에 무너졌기 때문이었음을 상기시킨 것이다.

"오로지 사욕의 발동으로 하는 일이란 예외 없이 그 과정과 결과가 고통과 허무, 이 두 가지일 뿐이다." 박 대통령이 정치를 시작하기 전인 1992년 1월 13일 일기장에 쓴 대목이다. 당시의 순수한 심정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 그래야 당장은 고통스럽겠지만 헌법의 수호자라는 대통령의 역할을 어느 정도라도 하고 역사의 법정에서 사면을 기대할 수 있다. 결단의 시간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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