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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국제 어린이구호단체 '세이브 더 칠드런'은 5살 이하 어린이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를 치유하겠다고 발표했다. 바로 연간 80만명이 넘는 어린이의 사망을 불러오는 설사병이었다.

그런데 어린이 설사를 예방하기 위해 혁신적인 기술 개발과 캠페인이 필요했다.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그 고결한 뜻에 공감해 캠페인 비용을 기부하겠다고 나선 기업이 있었다. 3년 동안 235만파운드(약 39억원)를 내놓겠다고 밝혔다. 그뿐 아니라 자신들이 나서서 어린이 설사병을 예방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는 데 투자하겠다고 했다.

이 기업이 레킷벤키저였다. 한국 어린이들이 사망하는 등 심각한 고통을 겪게 한 가습기 살균제를 만든 옥시레킷벤키저(현 RB코리아)의 영국 모기업이다. 영국 대표기업들이 편입된 푸치(FTSE)100에 속해 있으며, 60개 나라에 사업장을 두고 200개 나라에 제품을 팔고 있다.

레킷벤키저는 사회책임경영(CSR)을 표방하는 기업이다. 영국 왕자가 이끄는 기업네트워크 '커뮤니티의 기업'이 내놓은 기업책임지수에서 두번째로 높은 '플래티넘' 등급을 받기도 했다. 경제·환경·사회의 균형 있는 발전에 기여하는 기업들을 선정해 넣은 다우존스 지속가능성지수에도 편입되어 있다. 기업명 약자인 'RB'를 '책임있는 기업'(RB)이라고 풀어쓰기도 한다.

동양제철화학이 설립한 옥시는 2001년 레킷벤키저에 인수됐다. 그 뒤 2011년 유한회사로 법인 성격을 바꾸면서 레킷벤키저코리아로 이름을 바꿨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는 2006년 처음 불거졌지만 원인이 공식적으로 규명되지 않았다. 그사이 안전하다고 표시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다가 어린이들이 계속 건강을 해쳤다. 2011년 정부기관으로는 질병관리본부가 가습기 살균제 유해성을 처음 밝혔다. 2012년부터 피해자들의 민사소송이 이어졌다. 2013~2014년 정부 차원의 공식 조사가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2015년 관련 피해자 530명, 사망자 146명이라는 정부 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영국 석유기업 비피(BP)는 2010년 미국 연안에 기름을 유출해 바다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사회책임경영을 대대적으로 강조하던 모습이 위선이었음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비피는 200억달러(약 20조원)의 벌금을 미국 연방정부에 물어야 했다.

레킷벤키저 관련사의 제품은 한국에서 어린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책임기업이라는 슬로건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드러날 수밖에 없는 순간이다.

나는 2005년 이후 한국에서 사회책임경영 확산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외국 사례를 찾을 때면 영국의 경험을 중요하게 참고했다. 당시 영국 앤드루 왕자가 한국에 와서 소개했던 영국의 앞서가는 사회책임경영 사례들은 한국 기업에 깊은 인상을 줬다. '악한 기업'에 투자하지 않는다는 영국 연기금의 사회책임투자 관행은 한국 국민연금 운용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런데 영국 기업의 한국법인 옥시레킷벤키저가 보여준 모습은 끔찍하다. 어린이들이 죽어가는 중에도 적절한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정부 조사가 본격화하자 유한회사로 모습을 바꿔 기업 정보를 감췄다. 제품 유해성에 대한 연구는 입맛대로 나오도록 조작했다. 검찰 수사로 흘러나오는 내용들이다.

그동안 영국 본사는 전세계 어린이들의 설사병 사망을 막겠다며 거액을 기부하고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영국과 영국 기업들이 표방하던 사회책임경영은 기업의 사악함을 감추려는 위장술이었을까, 아니면 지금 이 사건이 사회책임경영의 큰 흐름 안에서 불거진 우발적인 사고인 것일까? 진실의 순간이 왔다.

가습기 살균제 앞에 선 사회책임기업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과 환경보건시민센터 등이 2015년 5월 영국 버크셔(Berkshure) 주의 슬라우시에 소재한 레킷벤키저 그룹(RB) 앞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에 대한 책임을 촉구하는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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