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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단체연합,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등 여성단체 회원들이 지난 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법무부와 검찰이 조직 내 성폭력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대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등 여성단체 회원들이 지난 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법무부와 검찰이 조직 내 성폭력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대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백소아 기자

“저는 성추행의 피해자이자 방관자였어요. 그러므로 가해자이기도 합니다.”

<한겨레>와 마주한 ㄱ씨는 막내부터 시작해 지금은 어느 정도 기반을 잡은 방송업계의 여성 중진 피디다. 그는 <문화방송>(MBC) 피디와 <시비에스>(CBS) 피디 등의 연이은 방송가 성추행 사건을 접하면서 “우리가 침묵하고 있었기에 이런 일이 끊이지 않는다는 죄책감이 들었다”고 했다. 검찰 내 성추행을 폭로한 서지현 검사를 보며 “뭐라도 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방송사 정식 직원이 아닌 외부 인력이라 ‘을’일 수밖에 없는 그는 “여전히 비겁한 거 같다”고 자책하면서도 “익명”을 원했다. “익명 미투운동이라도 활발하게 일어나 숨어 있는 가해자들이 자신이 한 행위가 들통날까봐 벌벌 떨기라도 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고백서이자 반성문인 그의 이야기를 <한겨레>가 별도로 취재한 사례 조사와 함께 1인칭 시점으로 정리했다.

■ 나는 피해자입니다

“신입 시절이었다. 악,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난 선택받아야 하는 을이었고, 그는 나를 선택해줘야 하는 갑의 위치였다. 계약을 위해 만난 자리에서 그는 반주한다며 술을 시켰다. 권하는 몇 잔을 마셨을 뿐, 난 전혀 취하지 않았다. 그는 연거푸 자작을 하더니 “그 가슴 다 니 거냐”는 등 언어 추행을 일삼았고 마침내 본색을 드러냈다. “나는 술이 취하면 섹스를 해야 해. 섹스를 하지 않으면 집에 들어가질 않아. 나랑 섹스해야 내가 집에 들어가.” “무슨 소리 하시는 거냐”며 일어섰지만 이내 따라와 내 어깨를 잡고는 강압적으로 돌려세우려고 했다. 소리를 지르며 무작정 내달렸다. 애써 잊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문화방송> 피디 성추행 사건을 접하면서 온몸이 떨렸던 그때의 공포가 다시 밀려왔다. 어쩜 이 바닥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걸까.”

지난해 영화진흥위원회가 실시한 ‘영화인 성평등 환경조성을 위한 성폭력(성차별) 실태조사’ 기초자료를 보면, 영화업계에 종사하는 여성 열명 중 한명이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요구받았다고 한다. 한 중견 작가도 신인 시절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한다. 술을 마시던 피디가 “한번만 하자”며 끊임없이 요구했다고 했다.

방송업계에서 추행은 공공연하다. 2016년 전국언론노동조합이 방송작가들을 상대로 조사한 자료를 보면 응답자 647명 중 39%인 253명이 성폭력을 당했다고 답했다. 허리를 감싸고 허벅지를 더듬는 건 추행으로 치지도 않을 정도로 예사다.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남자 카메라 스태프가 어린 여자 스타일리스트를 무릎에 앉혀놓고 얘기하는 일도 벌어진다. 심지어 최근엔 한 드라마 피디가 잠들어 있는 스태프의 바지 속에 손을 넣은 사실이 밝혀져 회사 차원의 조처가 취해지기도 했다.

사례를 수집해보면 언어 추행은 심각한 수준이다. 한 피디는 여자 스태프들이 있는 회의 시간에 보조출연자 몇 명을 투입하라는 얘기를 하면서 “방망이 몇 명 깔치 몇 명 데려오라”는 성적 비하 표현을 썼다. 지상파 방송사 간부가 섭외차 톱 여자배우를 만나고 온 외주제작사 대표한테 “아무개 똥구멍 쪽쪽 빨아주고 왔느냐”고 막말을 던진 사례도 있다. 작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어떤 피디는 ‘안마’ 얘기가 나오자 대뜸 “내가 ○작가 안마해주고 싶은데, 딴데까지 마사지하게 될까봐 못해주겠네”라고 실실 웃는다.

■ 나는 방관자였습니다

“그렇게 괴로우면서 왜 문제제기 하지 않았느냐고? 이런 일들이 처음이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대부분 성추행은 업계에 발 디딘 지 얼마 안 된 이들을 상대로 벌어진다. 지금처럼 연륜과 나이가 쌓였다면 몰래 녹취 버튼을 누르거나 고소하겠다며 협박이라도 했겠지만, 그때는 너무 갑작스럽게 닥친 일들에 그저 집에 와서 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을’ 중에서도 ‘을’인 당시의 내가 갑들과 싸우기에는 이 바닥의 구조는 여러 가지로 여자한테 불리했다. 작가나 스크립터, 외주제작사 프로듀서 등으로 일하는 여자들이 방송 콘텐츠 제작 과정의 권력관계 속에서 권력의 가장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하청에 하청을 거듭하는 비정규직 백화점이라 ‘갑’이 한 곳만 있는 것도 아니다. 방송사에서 을인 외주제작사는 또 다른 하청업체에는 갑이 된다.”

영진위의 성폭력 실태조사 기초자료에서도,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56.6%는 참았고, 39.4%는 모르는 척하면서 피했다고 나온다. ‘업계 내 소문이나 평판에 대한 두려움’(31.1%), ‘캐스팅이나 업무 수행에서 배제될까봐’(26.6%)여서였다. 언론노조 조사만 봐도 성폭력 가해자의 40%가 방송사 소속 피디 및 직원이었고, 43.7%는 외주제작사 소속 피디 및 직원이다.

“무엇보다 항의를 해봤자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내가 떠안게 된다는 사실이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항의를 해도 그들이 늘어놓는 변명은 뻔했다. “농담인데 별것도 아닌 걸 갖고 그래” “술 먹어서 기억이 안 나네.” 방송계는 어느 조직보다 말이 많고 빠른 동네이기에 갑인 가해자들은 오히려 피해자를 문제를 일으키는 ‘미친년’으로 몰아간다. 나를 꽃뱀으로 몰고 행실을 문제 삼았다. 쟤를 고용하면 시끄러워진다며 피하고 권력을 이용해 찍어 누르며 일을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성추행 그 자체보다 참기 힘들었던 건 2차 피해다. 조직원이 아닌 나를 보호해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도 용기를 낸 적이 있다. 10년차를 넘어섰을 무렵,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생각에 고소하려고 변호사까지 알아봤다. 하지만 그래 봤자 너만 손해라는 얘기들만 오갔고, 나를 응원하던 이들도 어느 순간 ‘이제 그만하라’며 ‘독한 여자’로 몰고 갔다. 실제로 한 여자 스태프는 남자 스태프한테 성추행을 당한 뒤 제작사에 문제제기를 했다가 둘 다 잘렸다. 남자 스태프는 곧 다른 작품에 투입됐지만 여자 스태프의 행방은 묘연하다. 먹고 살아야 해서 참고 있다고? 밥벌이보다 중요한 건, 내가 너무 사랑하는 소중한 이 일을 더는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냥 참고 넘기자는 생각이 반복되면 어느순간 자포자기의 심정이 된다. 남자가 90% 이상 되는 곳에 내가 내 발로 들어갔으니 이 정도는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여자라서 그래’라는 소리 듣지 않으려고 쿨한 척, 괜찮은 척 해온 것도 성폭력을 배불린 게 아닐까, 생각하면 자괴감만 들 뿐이다.”

■ 나는 가해자입니다

“그래서 나는 방관자이고 그러했기에 가해자가 됐다. 문제제기를 해도 결국 피해를 보고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알았기에 나는 남의 아픔에도 침묵했다. 한 여자 스태프가 성추행을 당했고, 남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피해자를 욕할 때, 그 틈에 껴서 영혼 없이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내가 사랑하는 일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뭔가를 결정할 수 있는 위치였거나 목소리를 내도 지켜줄 보호막이 있었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텐데’라고 자위해도 내 안위를 먼저 걱정했다는 죄책감을 씻을 수 없다.”

느리지만 최근 방송업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한국방송작가협회는 성추행에 휘말린 작가의 가입을 불허했고, 최근 상습적으로 성추행해도 그냥 쉬쉬하며 넘어갔던 <문화방송> 피디가 대기발령된 것은 희망적이다. 문학, 법조계 등 곳곳에서 성폭력 문제가 불거지면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분위기와 여자 피디가 많아진 것이 변화를 이끌고 있다. <문화방송>은 여성 피디들이 중심이 돼 2016년부터 작품에 들어가기에 앞서 성폭력 교육을 하거나 대본에 성폭력 지침을 넣기도 했다.

“과연 우리나라에도 외국처럼 ‘미투’ 운동이 거세게 불 수 있을까? 나는 좀 회의적이다. 할리우드와 달리 입을 여는 유명 배우들이 없고, 아직은 간부 다수가 남성이라 성추행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각 분야의 협회 간부들도 대부분이 남성들이며 그중엔 본인이 성폭력에 휘말린 이들도 있다. 어쩔 수 없는 구조를 당장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책하기에 앞서 익명이라도 조금씩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힘없는 보조 작가, 막내 스태프들을 위해 나라도 싸워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들고 있다. 한두마디씩 보태진다면, ‘적어도 잠재적 가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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