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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투표해야 하는가
ⓒ뉴스1

1.

대의민주주의는 참된 민주주의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소수가 지배하는 과두제의 포장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대의민주주의의 수단인 선거나 투표를 냉소하거나 거부하는 이들이 있다. 며칠 남지 않은 대선을 앞두고 원론적으로는 타당해 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무익하거나 심지어는 해로운 주장의 의미를 살펴보고 싶다. 현실정치는 정치철학이나 정치학의 놀이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묻는다. 왜 투표해야 하는가.

2.

지식인이나 작가, 시인은 민주주의가 구현할 수 있는 최대의 희망, 혹은 "절대희망"(김해자 시인)을 말한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현실에서 벌어지는 대의민주주의의 모습은 초라할 수 있다. 한 예를 들자. 한동안 한국문학 공간에서 '문학과 정치'의 관계를 새롭게 사유하는 데 기댈 만한 정치절학자로 자크 랑시에르가 종종 인용되었다. 최근 대의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한 그의 인터뷰를 읽었다.(자크 랑시에르, "민주주의에 반(反)하는 대의제를 목도하다", 〈르몽드 디플로마크〉). 인터뷰에서 랑시에르는 "모든 권력을 직업 정치인들에게 일임하는 프랑스 시스템이 (기존 방식으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을 표방하는 후보자들을 기계적으로 찍어낼 뿐"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대의민주제는 시민들이 필연적으로 소외되는 잘못된 제도이다. 대의제로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일궈낼 수 없다. 그의 발언에는 새겨들을 대목도 적지 않다. 시민들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우리를 대표한다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주장, "국민들이 대표자를 선출함으로써 자신들을 표현한다"는 비판 등은 날카롭다. "국민은 정치과정에 선행해 존재하는 게 아니며, 오히려 이런 과정의 결과물"이다. 그 결과 국민들은 전문가들이 자신들을 대표하기보다는 그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그대로 대신 실현해주는 화신이 돼주기를 바란다. 랑시에르는 그런 시각을 "신화적 사고"라고 비판한다. 쉽게 말하면 주권자인 시민들이 주권적 사유와 행동을 포기하고 그 대상이 누구든 대리권력이 자신을 대신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신화적 사고"다. 신화의 영웅처럼 등장하는 대리권력을 추종할 때, "신화적 사고"가 탄생한다. 신화적 사고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3.

랑시에르가 비판하는 "신화적 사고"의 위험에 쉽게 빠질 수 있는 대의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가장 적합한 형태인가? 이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아직까지 인류는 대의민주주의를 넘어서면서 시민의 주권을 최대한 구현할 수 있는 다른 민주주의 체제를 개발하지 못했다. 그래서 영웅주의 역사관의 위험을 감지하면서도, 나는 이런 발언에 기본적으로 공감한다. "역사는 개개의 인간 때문에 바뀌는 것은 아니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나도 절반쯤은 동의한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 정도는 바뀔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지금도 나는 오래전 이탈리아의 경제학자가 쓴 책에 나온 구절을 잊을 수 없다. 오늘날까지 인류는 온갖 정치체제를 생각해냈다. 왕정, 귀족정이라고도 불리는 과두정, 민주정, 그리고 공산주의 체제. 하지만 지도자 없는 정치체제만은 생각해내지 못했다."(시오노 나나미,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세계〉(하권), 433면) 현대민주주의는 대중민주주의이다. 대중민주주의이기에 대중은 통치행위에서 소외된다. 그 소외의 다른 표현이 랑시에르가 비판하는 "신화적 사고"다. 시민들이 신화적 사고에 사로잡힐 때 시민은 그들이 선출한 대리권력에 자신의 욕망을 소극적으로 투사하면서 수동적 존재가 된다. 대의민주주의의 위험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서 민주주의를 포함한 어떤 제도를 막론하고 인류는 아직 지도자 없는 정치제도를 발명하지 못했다. 지도자의 역량만을 강조한다면 엘리트주의나 영웅주의가 되겠지만, 대리권력과 지도자의 역할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조야한 대중주의(포퓰리즘)가 된다. 그러므로 대의민주제에서 지도자와 시민의 관계가 문제이다. 현대대중민주주의에서 '명목상' 주권자인 시민대중이 민주주의의 '실질적' 주체인지는 의문이다. 그러므로 더욱 민주주의 체제에서 지도자의 역할과 역량이 중요해지며, 그런 지도자를 감시하는 대중의 민주주의적 통제가 관건이 된다.

4.

랑시에르 같은 이론가나 작가, 시인들이 시도하는 대의민주주의 비판은 '이론적'으로 설득력이 있다. 그들은 그렇게 최대의 희망을 말하는 존재들이다. 그것이 그들의 역할이다.(예컨대 논란이 된 성소수자를 비롯한 '인권'의 정치가 그렇다) 하지만 현실정치의 논리는 다르다. 대의민주제에서 현실정치인들은 표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이걸 인정하지 않는 건 관념적이다. 그러므로 현실정치인들이 최대의 희망을 대변해야 하는, 랑시에르 같은 (정치)철학자나 지식인의 기대에 못 미치는 건 일면 당연하다. 그걸 탓하는 건 나이브하다. 이 간극을 인지해야 한다. 현실정치권은 언제나 최소의 희망을 말한다. 광장의 촛불시민들은 최대의 희망을 원했다. 뛰어난 정치인은 그 간극을 좁히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인류역사상 그런 위대한 정치인은 언제나 극소수였다. 왜 그런 정치인이 여기 없느냐고 탓할 이유가 없다. 그런 냉소주의에서 투표 포기의 논리가 나온다. 이상과 현실의 경계를 날카롭게 구분하지 못한 잘못된 판단이다. 누구를 지지하든, 그렇게 선출된 대리권력이 주권자인 시민들의 희망을 '자동적'으로 실천하지는 않는다. 대리권력은 언제나 자신들의 욕망을 앞세운다. 감시받지 않는 권력은 주권자를 배반한다. 그러므로 대리권력 후보들에게 과도한 자기욕망이나 기대를 투사해서는 곤란하다. 저들은 저들의 일을 하고, 주권자인 시민들은 시민들의 일을 해야 한다.

  

 

5.

요약하자.

첫째, 대의민주주의의 문제를 이론적, 원론적으로 비판하는 건 필요하다. 하지만 대의민주제가 현실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대중민주주의 시스템에서 선거와 투표는 주권자가 주권을 행사하는 유일한 방도는 아니지만, 매우 유력한 통로이다. "투표는 탄환보다 강하다"(링컨)라고 말하는 건 분명 과장이다. 그러나 투표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도 안된다. 이번 선거에 적극 참여할 것을 제안하면서 내 강의의 수강생들에게 했던 말이다.

"여러분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라. 최선의 후보가 없으면 차악의 후보를 선택하라.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국민을 말한다. 입발린 소리다. 잊지 말라. 정치인들은 국민 일반에 관심 없다. 그들은 오직 투표하는 유권자만을 두려워한다. 여러분의 목소리를 저들이 듣게 만들려면 투표해야 한다."

덧붙여 최근에 읽은 인상적인 칼럼의 한 대목을 옮겨둔다. 투표는 "역사의 무의식 만들기"다.

"내 주변에는 젊은 날에 혁명투사였으며 지금도 사실상 혁명투사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대선에서건 총선에서건 투표 같은 것을 외면하고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거대한 혁명이 투표 행위로 줄어든 것이 한심해서일까. 불타버린 노적가리에서 타다 남은 낟알이나 줍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나는 그 친구들 옆에서 투표는 역사의 무의식 만들기라고 자주 되풀이 말하곤 한다. 성급한 사람들에게는 투표가 '어느 세월에'라고 한탄하게 하는 영원히 가망 없는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침내 꽃 피는 난초 분들이 있고, 잘 자란 아이들이 있다. 마침내 깨어지는 벽이 있다. 그래서 투표는 역사적 무의식이자 그 거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투표는 저 역사적 무의식의 세포를 바꾼다."(황현산)

둘째, 하지만 선거에 적극 참여하는 것과는 별개로, 주권자인 시민은 주권자와 대리권력의 간극이 생길 수밖에 없는 대의민주주의의 맹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신화적 사고"가 나타난다. 선출된 대리권력에 주권을 소극적으로 맡길 것이 아니라 그 대리권력을 주권자가 능동적으로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의 마련과 비판적 태도가 필요하다. 감시받지 않는 권력이 타락한다는 것은 역사에서 검증된 진리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태도는 나이브하다. 시민의 주권을 일방적으로 그들에게 양도하는 잘못된 "신화적 사고"의 소산이다.

셋째, 그러므로 주권자인 시민은 대의민주주의의 필요악을 냉정하게 인정하면서 대리권력을 뽑는 선거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하지만 선거가 끝난 뒤 주권자인 시민들은 그들이 선출한 대리권력을 냉정하게, 적극적으로 감시해야 한다. 그런 참여에서만 필요악으로서의 대의민주주의가 과두제로 타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지난 몇 달 동안의 탄핵국면과 촛불혁명에서 배워야 할 민주주의의 교훈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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