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임성한 작가의 ‘신기생뎐’
임성한 작가의 은퇴 소식이 알려진 지난 23일 누군가 내게 물었다. “막장 드라마의 효시 격이라고 볼 수 있나요?” 순간 기분이 복잡미묘해졌다. 따지고 보면 임성한은 막장 드라마의 포문을 연 작가도 아니고, 그 장르의 제일 최신주자도 아니다. 굳이 효시를 꼽자면 1993년 에스비에스(SBS) <댁의 남편은 어떠십니까>를 선보인 서영명이 있고, 최신주자를 찾자면 문화방송(MBC) <사랑했나봐>(2012~2013), <모두 다 김치>(2014)의 원영옥이 있다. 대중성으로 보면 에스비에스 <아내의 유혹>(2008)과 문화방송 <왔다! 장보리>(2014)의 김순옥이 한 수 위고, 통속성으로 치면 한국방송(KBS) <왕가네 식구들>(2014)의 문영남을 이기긴 어렵다. 그러나 우린 ‘막장 드라마’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조건반사처럼 임성한을 떠올린다. 열 작품을 쓰고 나면 은퇴하겠노라고 말했다는 임성한 작가는, 그 열 작품을 채 끝내기도 전에 ‘막장 드라마’라는 장르 자체를 대표하는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며칠전 은퇴한 그는
드라마 작가라기보단
시청률이 안겨주는
권력에 취한 폭군에 가까웠다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 문화방송 일일드라마 <보고 또 보고>로 대중적 인지도를 쌓은 1998년만 해도 이 지경까지는 아니었다. 물론 그때도 실생활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겹사돈’ 설정이라거나, 자매 중 언니 금주(윤혜영)만 병적으로 편애하는 엄마(김창숙)의 존재, 기정(정보석)과 은주(김지수)가 처음 마주치는 장소로 등장하는 <품바> 공연장 등 훗날 임성한 월드를 구축하는 요소의 단초가 보이긴 했다. 그래도 <보고 또 보고>에는 분명한 줄거리라는 것이 있었다. 보수적인 양가 부모들, 뿌리깊은 편애, 형님이 동서가 되고 동생이 형님이 되는 배배 꼬인 겹사돈이라는 장애물들을 뚫고 이 젊은 두 커플이 가족을 이룬다는 중심 줄거리는 한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고, 과정이야 어쨌든 무난한 해피엔딩을 향해 나아가는 서사는 논란을 이겨내는 원동력이었다. 일일드라마 사상 최고 시청률 57.3%, 문화방송이 일일드라마로 한국방송을 이긴 최초의 순간이었다.
임성한 작가의 ‘압구정 백야’(문화방송), 문영남 작가의 ‘왕가네 식구들’(한국방송), 김순옥 작가의 ‘왔다! 장보리’(문화방송)
첫 장편 드라마에서 역대 최고 시청률을 찍었던 게 문제였던 걸까. 두번째 장편이던 문화방송 <온달왕자들>(2000)에서 임성한은 자극적인 서사의 강도를 높였다. 6명의 배다른 자식을 남기고 무책임하게 죽어버린 아버지(변희봉)라거나, 힘겹게 세파를 헤쳐나가는 형제들 앞에 끼어드는 아버지의 후처들 같은 요소들은 전작의 겹사돈 논란 따위는 귀여워 보일 정도의 소재였다. 연출을 맡은 조중현 감독은 대놓고 “이런 이상한 작품은 도저히 못 하겠다”며 직접 대본에 손을 댔고, 이에 대고 임성한은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으르렁댔으며, 그 과정은 언론을 통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그럼에도 <온달왕자들>은 다시 한번 동시간대 한국방송 일일드라마를 이기는 기염을 토했다. 한국방송 <좋은 걸 어떡해> 또한 전남편의 친구와 재혼을 한 뒤에야 전남편의 아이를 임신하는 파격적인 전개를 선보였지만, 최후의 승자는 <온달왕자들>이었다.
자신의 각본을 “이상”하다며 임의로 고친 감독 탓에 자존심은 상처 입었지만, 그 “이상”한 각본으로 다시 한번 한국방송을 이긴 상황. 누구도 자기 작품에 토를 달지 못할 만큼 높은 시청률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온달왕자들> 이후 2년 만에 돌아온 문화방송 <인어아가씨>(2002)에서 여주인공 은아리영(장서희)의 직업이 ‘잘나가는 드라마 작가’라는 점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젊고 아름다우며 춤도 잘 추고 쓰는 드라마마다 흥행하는 작가 은아리영은, 그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의붓어미이자 톱탤런트인 심수정(한혜숙)의 뺨을 때리고 이복동생 예영(우희진)의 약혼남 주왕(김성민)을 빼앗는다. 은아리영은 분명 임성한의 페르소나였고, 임성한은 그의 입을 빌려 같은 방송사의 다른 드라마를 비하하는 것도 모자라 시청자들을 향해 “딸기는 칫솔로 박박 씻어야 한다”거나 “김치찌개는 2시간 이상 푹 끓여야 한다”는 식의 이상한 주장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인어아가씨>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초창기 문화방송 <베스트극장>에서 보여준 준수한 단막극을 닮은 드라마로 방향을 전환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순간 최고 시청률 47.9%를 찍은 이 드라마 이후 임성한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딸의 불임은 어머니의 업보 때문’이라는 식의 미신이 스멀스멀 드라마 안으로 기어들어왔고, 마마보이인 캐릭터의 이름을 ‘마마준’(정보석)이라고 짓는 기괴한 작명 방식도 이때 시작됐다. 그 모든 요소들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논란은 오히려 시청률 상승을 부추겼다. 세간의 비판과 손가락질에도 시청률은 40%를 넘나들었고, 96부작으로 기획되었던 드라마는 방송사 쪽의 요구로 246회로 마무리되었다. 시청률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지독한 서사와 더 독한 대사, 미신과 무속의 요소와 정체불명의 생활 상식, 의미없는 개그 장면이나 만인에 대한 만인의 뒷담화 같은 요소들이 복잡하게 몸을 섞은 임성한 드라마 고유의 작법은 이 무렵 탄생했다. 남자의 복근을 빨래판 삼아 빨래를 하는 꿈 시퀀스나 귀신에 빙의한 남자가 눈에서 레이저빔을 쏘는 장면(이상 에스비에스 <신기생뎐>, 2011)을 삽입하면 황당한 맛에 시청률이 오를 것이란 사실을, 서사와는 별개로 겉도는 은아리영의 춤 솜씨나 드럼 실력 따위를 전시하며 시청률을 올렸던 그 순간 간파했던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주인공 두 사람의 대화로 30분을 채우면서도 팽팽한 서스펜스를 유지할 수 있는 필력을 지녔으면서(문화방송 <압구정 백야>, 2014~ ), 임성한은 그 필력으로 탄탄한 서사를 완성하기보단 자신의 관심사(무속, 미신, 스포츠)나 주장, 편견을 최대한 자극적으로 전시하기 위해 서사를 해체해버렸다.
정보석이나 허준호 같은 당대 톱스타 배우들을 주연으로 기용하던 임성한이 신인이나 중고 신인들을 주연으로 기용해 작품에 대한 통제력을 늘리기 시작한 것도 <인어아가씨> 무렵이었다. 임성한은 방송사엔 시청률을 보장하는 스타 작가였고, 동시에 주연배우들에겐 오랜 무명을 벗어날 수 있게 해준 은인이 되었다. 그 은인이 쓴 대본이기에, 배우들은 어떤 대사라도 감히 거스르지 못한다. 문화방송 <오로라 공주>(2013)에서 “암도 생명체인데 같이 살아야죠”란 대사를 받고 5분간 말문이 막혔다는 서하준은, 그럼에도 임성한을 은인으로 꼽길 주저하지 않는다. 이렇게 캐스트를 장악한 임성한은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다른 프로그램들을 흉보고, 입양아와 성 소수자에 대한 지독한 편견과 무지를 과시했으며, 황당한 설정이나 대사에 항의하는 중견배우들을 임의로 하차시켜 버렸다.
그는 갔지만 막장은 남는다
이미 원영옥 구현숙 등의
신예들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으니
작품 외적으론 좀처럼 노출을 꺼리는 임성한인지라, 그가 어떤 속내로 여기까지 걸어왔는지 그 심사를 넘겨짚는 건 무리다.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행보 자체를 평가하는 것은 가능하다. 임성한은 연출자에게 ‘월권’을 당했다고 생각하자 다음 작품 주인공을 무소불위의 작가로 설정했고(<인어아가씨>), 등장인물이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한다는 내용을 관철시키려다 방송사에 의해 하차당하자(문화방송 <왕꽃선녀님>, 2004~2005) 바로 방송사를 바꿔 더 독한 드라마(에스비에스 <하늘이시여>, 2005~2006)를 선보였다. 무분별한 주조연급 배우 하차로 작품이 인기를 잃자, 아예 등장인물을 죽이는 것 자체를 엔터테인먼트 삼아 시청률을 끌어올리고는 방송사에 일방적으로 50회 연장을 요구했다(<오로라 공주>). 작가의 독선을 비판한 배우들을 향해선 극중 대사를 통해 “자기 이미지 띄우고 싶으면 본인 돈으로 드라마를 찍으라”고 비아냥댔다. 그 모든 순간, 임성한은 작가라기보단 시청률이 안겨주는 권력에 취한 폭군에 가까웠다. 시청률을 위해 서사를 해체하는 이를, 작가라 불러선 안 되니 말이다.
임성한은 가도 막장은 남는다. 이미 원영옥이나 문화방송 <백년의 유산>(2013), <전설의 마녀>(2014)를 집필한 구현숙 등의 신예들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으니까 말이다. 설마하니 임성한 같은 이가 또 나오랴 싶겠지만, 그도 처음부터 그런 작가는 아니었다. 재미있다는 이유만으로 제2, 제3의 임성한을 용인할 것인가. 채널 선택은 리모컨을 손에 쥔 우리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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