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고 싶다."
지난 8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바스티유 광장에 등장한 시위 팻말의 문구다.
오늘의 생존과 내일의 희망을 지키려는 시민들의 외침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거리에서 분노의 불길로 번지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대응은 불평등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할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 시위 가담자 색출과 강경한 치안 대책에 무게를 두고 있다.
정부의 강경 진압은 시위를 잠재우기는커녕 오히려 충돌을 격화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17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레퓌블리크 광장에서는 경찰이 섬광탄을 사용해 진압에 나서자 검은 옷을 입은 일부 폭력 가담자들이 와인 전문점의 유리창을 부수고 들어가 와인병을 가져와 경찰을 향해 던지는 일이 벌어졌다. 강경 진압과 폭력적 저항이 반복될수록 거리의 분노는 더욱 거칠어지고 시민들이 애초에 거리로 나왔던 이유는 점점 시야에서 멀어진다.
불타는 자동차 한 대와 약탈당한 상점의 모습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강경한 치안 대책의 필요성을 부각한다. 시민의 분노가 폭력으로 비치는 순간, 그 원인보다 분노를 통제하는 일이 정치의 중심이 돼버린다.
이번 프랑스 시위의 출발점은 학교였다. 지난 9월 파리 외곽을 비롯한 프랑스 수도권의 고등학생들이 교사와 교직원 부족, 낡은 학교 시설, 과밀학급 등에 항의하며 거리로 나섰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역의 열악한 교육환경에 대한 불만이 컸다.
이후 시위는 대학생과 노동조합, 과거 '노란 조끼' 운동 참여자들까지 가세하면서 생활비 상승과 공공서비스 전반에 대한 불만으로 확산됐다. 미래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정작 그 미래를 준비할 최소한의 교육환경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왔다는 사실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역설적이게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016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 직후 펴낸 책의 제목은 '혁명(Révolution)'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낡은 정치와 사회를 바꾸겠다는 포부와 함께 교육에 대한 투자와 기회의 평등을 강조했다. 누구나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프랑스의 학생들은 교사와 교실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왔다. 혁명을 약속했던 대통령이 이제는 변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목소리와 마주한 셈이다. 그가 꿈꿨던 혁명은 시민들의 삶을 얼마나 바꿔놓았을까.
프랑스 시위대는 거리에서 58년 전의 혁명을 소환했다. "68혁명은 그들의 것이었다. 2026년은 우리의 차례다." "2026년 10월은 새로운 68혁명이다." 시위 현장에 등장한 팻말에는 반세기 넘게 이어져 온 프랑스 저항의 역사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청년들이 마주한 현실은 사뭇 다르다. 1968년의 청년들이 더 자유로운 세상과 새로운 사회를 꿈꿨다면 2026년의 청년들은 교사와 교실, 안정적인 일자리와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왔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혁명의 언어가 이제는 자신의 미래를 지키겠다는 절박한 외침이 된 것이다.
청년들의 요구는 갈수록 깊어지는 사회적 양극화와 맞닿아 있다. 양극화는 소득 격차만을 뜻하지 않는다. 교육과 주거, 안정적인 일자리에 접근할 기회마저 경제적 여건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기대할 수 있는 미래가 서로 다른 것이다. 현재의 격차가 미래의 가능성까지 좌우한다는 데 양극화의 더 깊은 문제가 있다.
경제적 압박도 커지고 있다. 프랑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9월 소비자물가는 지난해 같은 달 대비 3.1%, 에너지 가격은 21.3% 상승했다. 이탈리아 통계청이 발표한 같은 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4.2%였고, 정부 규제를 받는 에너지 품목의 가격은 25.8%나 뛰었다. 특히 올해 3분기 이탈리아의 지출 수준이 낮은 가구에서 체감하는 물가 상승률은 4.4%로, 지출 수준이 높은 가구의 2.9%보다 높았다. 같은 물가 상승도 누군가에게는 소비를 조금 줄이면 되는 문제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생존의 문제가 된다.
도시의 화려한 쇼윈도는 누구에게나 같은 풍경을 보여주지만, 그 안의 풍요가 모두에게 같은 기회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노력하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 무너지고, 자신의 처지를 바꿀 기회조차 공평하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 불평등은 사회적 박탈감이 된다. 경제적 격차가 기회의 격차로, 다시 사회적 불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서로의 현실을 이해할 기회마저 줄어들면서 사회의 균열은 깊어진다.
이탈리아에서도 비슷한 박탈감이 드러나고 있다. 밀라노 시위 이후 모습을 드러낸 청년 운동 '10월17일 운동'은 지난 20일 발표한 선언문에서 기성 정치권이 자신들의 미래를 담보 잡고 팔아넘겼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우리는 기다리기를 그만두기로 한 청년들"이라며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에게서 의자를 빼앗아 간 사람들의 식탁에 자리를 얻고 싶은 게 아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아래로부터 또 다른 식탁을 만들고 싶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이미 차려진 식탁에서 빈자리 하나를 얻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앉을 수 있는 새로운 식탁을 만드는 일이다. 더 나은 삶을 향한 희망이 사라지고, 그 희망을 되찾을 기회마저 빼앗겼다고 느낄 때 사회를 향한 불신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복잡한 사회적 갈등 앞에서 프랑스와 이탈리아 정부가 내놓은 대응은 강경한 치안 대책에 집중돼 있다. 프랑스 정부는 파리와 리옹 등 일부 도시에서 제한적인 야간 통행금지령을 시행한 데 이어 국가 비상사태 선포 가능성까지 열어뒀다. 오는 24일 예정된 추가 시위에 대비해서는 대테러 경계작전인 '상티넬(Sentinelle)' 소속 군 병력을 주요 시설 경비에 투입하고, 경찰력을 시위 대응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이탈리아 정부도 밀라노에 군 병력 500명을 추가 배치하기로 했다.
처벌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이탈리아 정부가 지난 20일 승인한 새 치안 대책에는 시위 중 폭력에 가담하는 행위를 별도의 범죄로 규정해 최대 징역 5년과 벌금 2만 유로(약 3천만 원)를 부과하고, 미성년자가 저지른 재산 피해에 부모도 배상책임을 지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교사와 교실을 요구하며 시작된 시위가 군 병력의 지원까지 동원해야 하는 사회적 갈등으로 번진 현실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정부는 거리의 질서를 회복한다고 해도, 청년들이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조건은 바뀌지 않는다. 국가 비상사태를 검토하고 군 병력까지 동원해 당장의 불길을 잡을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래를 잃었다는 시민들의 분노까지 잠재울 수는 없다.
정치적 책임 공방도 거세다. 미국의 일부 정치인들은 프랑스의 폭력 사태를 이민 문제와 연결했고, 프랑스 정부는 급진좌파 세력과 범죄자들의 책임을 강조했다. '왜 사람들이 분노했는가'라는 질문이 '누가 사회의 적인가'라는 논쟁으로 바뀌면서, 양극화로 생겨난 균열 위에 적대감까지 쌓이는 셈이다.
국가의 공권력 행사 역시 엄격한 기준과 책임에서 예외일 수 없다. 프랑스에서는 지난 5일 랑스의 한 고등학교 앞에서 경찰이 사용한 수류탄이 폭발해 15세 학생이 왼손을 잃었다. 지난 17일 뮐루즈에서는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던 17세 여학생이 시위 현장 인근에서 발사체에 맞아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에 맞았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이 나왔으며, 정확한 사고 경위에 대해서는 경찰 감찰기구가 수사 중이다. 거리의 불길을 잡으려던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미성년자의 심각한 부상은 공권력 행사의 적절성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을 남겼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18일 대국민담화에서 폭력을 강하게 규탄하면서도 정당한 요구를 가진 시위대와 파괴 행위에 가담한 이들을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해 지원과 대화를 약속하고 치안 대응 과정의 문제도 살펴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깨진 유리창을 복구하는 것만큼이나 다친 시민들의 삶과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일도 중요하다. 한때 '혁명'이라는 책으로 변화를 약속했던 대통령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또 다른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시민들이 그 변화를 자신의 삶에서 체감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아닐까.
시위를 막고, 유리창을 교체하고, 거리를 청소했다고 해서 그곳에 쌓여 있던 불평등과 불신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정부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눈앞의 불길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는 사람들의 분노일지도 모른다. 삶을 짓누르는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한, 그 분노는 언제든 다시 거리로 터져 나올 수 있다. 변화를 향한 분노의 불씨는 여전히 청년들 마음에서 붉은 빛으로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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