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14일 도쿄 국회에서 열린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자신의 일과를 소개하며 "남성 총리보다 3~4시간 정도 더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10월14일 도쿄 국회에서 열린 중의원 예산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일본 나루히토 일왕(가운데)과 마사코 왕비(왼쪽 두 번째), 아이코 공주(왼쪽)가 10월3일 도쿄 승마공원에서 열린 2026 아시안게임 승마 장애물 비월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로이터/AFP/연합뉴스
해당 발언은 연립여당인 일본유신회의 후지타 후미타케 공동대표가 총리의 장시간 국회 출석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이에 다카이치 총리는 국정 운영에 쫓겨 국가의 미래를 전략적으로 구상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토로했다. 첫 여성 총리라는 점에 비서관들도 아직 익숙하지 않다며, 전국에 생중계되는 국회 회의를 앞두고 화장을 고칠 3~5분의 시간조차 확보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총리의 업무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취지였지만, 발언은 뜻밖의 논쟁으로 번졌다. 일본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여성조차 가사노동과 외모 관리에 드는 시간을 호소해야 한다는 점에서다. 이날 AFP는 이 발언을 전하며 일본 사회에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성 역할 구분과 여성의 낮은 정치 참여 현실을 짚었다.
집안일은 여성 75%, 남성 25%
일본 가정에서는 가사노동의 4분의 3을 여성이 담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시장조사업체 크로스마케팅이 지난 8월27일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배우자나 파트너와 함께 사는 가구의 평균 가사 분담률은 여성 75%, 남성 25%로 집계됐다. 이는 전국 18~79세 남녀 3천 명을 대상으로 가사 분담 실태를 스스로 평가하도록 한 결과다.
가사 분담을 바라보는 남녀의 만족도 역시 큰 차이를 보였다. 여성들이 남성 파트너의 가사 참여에 매긴 점수는 100점 만점에 평균 54점에 그쳤다. 반면 남성들이 여성 파트너에게 매긴 점수는 81점으로, 무려 27점이나 높았다. 같은 가사 분담을 두고 남녀가 느끼는 만족도에 상당한 온도 차가 드러난 셈이다.
성별에 따른 고정적인 역할 분담은 점차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쿠호도 생활종합연구소의 2026년 조사에서 기혼 응답자의 52.8%는 가정 내 역할 분담이 '아내는 집안일, 남편은 바깥일'에 가깝다고 답했다. 2018년 65.8%에서 13%포인트 줄었지만 여전히 절반을 넘는다. 부부가 가사·육아와 일을 평등하게 분담한다는 응답은 14.9%에 그쳤다.
총리는 여성인데 의원은 15%도 안 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10월14일 도쿄 국회에서 열린 중의원 예산위원회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한편, 다카이치 총리의 발언을 두고 일본 온라인에서도 비판이 나왔다. 일본 여성 주간지 '주간여성 프라임'은 15일 "여성 지도자가 절대 해서는 안 될 말", "첫 여성 총리가 이런 상황에서 '여성이니까'라는 논리를 쓰다니 실망스럽다"는 등의 온라인 반응을 소개했다.
여성에게 가사노동이 집중되는 현실과 별개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 지도자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하는 것은 여성의 지도력에 대한 편견을 강화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반면 다카이치 총리의 발언이 남성 중심으로 운영돼 온 일본 정치의 현실을 보여준다는 해석도 있다. 여성 총리가 국회 출석 전 화장을 고칠 최소한의 시간조차 일정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다.
일본의 성별 격차는 정치권에서도 뚜렷하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지난 9월16일 발표한 '2026 세계 성 격차 보고서'에서 일본은 145개국 중 117위다. 주요 7개국(G7) 가운데 최하위를 기록했다.
지난 2월8일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도 여성 당선자는 전체 465명 중 68명으로, 14.6%에 그쳤다. 일본 역사상 첫 여성 총리가 탄생했지만 국회의원 7명 중 여성은 1명꼴에 불과한 것이다.
국민 72%가 여성 일왕 찬성하는데, 아이코 공주는 왕위 계승 불가
나루히토 일왕이 9월19일 일본 나고야 미즈호공원 육상경기장에서 열린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개회식에서 공식 개회를 선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성의 지위를 둘러싼 논쟁은 일본 왕실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나루히토 일왕의 외동딸인 아이코 공주는 일본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는 왕실 인물이다. 마이니치신문이 지난 5월23~24일 전국 18세 이상 성인을 대상으로 실시해 30일 보도한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2%가 여성 일왕을 허용하는 데 찬성했다. 반대는 10%, 모르겠다는 응답은 17%였다.
지난 7월 일본 국회는 왕족 수 감소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왕위 계승 관련 법률을 개정했다. 여성 왕족이 일반인 남성과 결혼한 뒤에도 왕족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고, 과거 왕족 가문의 남계 남성 후손을 양자로 받아들이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여성에게 왕위 계승권을 부여하는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다카이치 총리 역시 남계 계승의 역사적 전통을 강조하며 여성의 왕위 계승 문제는 향후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결혼하면 94%가 남편 성 따라, 10대 여성 절반은 "각자 성 쓰자"
여성의 선택권을 둘러싼 제도적 논쟁은 왕실 밖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결혼 후 부부의 성씨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일본은 법적으로 부부가 같은 성을 사용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 중 누구의 성을 따를지는 선택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 성을 바꾸는 쪽은 대부분 여성이다.
일본 내각부에 따르면 2024년 혼인 신고를 한 부부의 94.1%가 남편의 성을 선택했다. 법률상 부부에게 동등한 선택권이 주어져 있지만 실제로는 여성 10명 중 9명 이상이 결혼과 함께 성을 바꾸는 셈이다.
젊은 세대의 인식은 다르다. 일본의 민간 공익재단인 일본재단이 지난해 8월 15~17일 전국 17~19세 남녀 1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9월18일 발표한 조사에서 여성 응답자의 53%가 원하는 부부에 한해 서로 다른 성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선택적 부부별성제' 도입에 찬성했다. 현행 부부 동성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응답은 12.9%에 그쳤다.
그러나 다카이치 정부는 기존의 부부 동성제를 유지하면서 결혼 전 성을 사회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일본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분명 달라지고 있다. 첫 여성 총리가 탄생했고, 가정 내 성 역할에 대한 인식도 변하고 있다. 하지만 가사노동부터 정치적 대표성, 왕위 계승, 결혼 후 성씨 문제까지 제도와 현실 곳곳에는 여전히 성별 격차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