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사우디)의 간곡한 지원 요청에도 친이란 성향의 후티 반군에 대한 공습을 전격 취소했다.
이 틈을 타 후티 반군은 홍해 연안과 사우디 지원 세력의 지배지를 갈라놓는 예멘의 전략적 고지대를 빠르게 점령해가고 있다. 미국의 군사적 방패가 사라지면서 사우디는 결국 '이란과 타협'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분석이 외신과 싱크탱크에서 잇따라 나오고 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 AFP통신=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며칠간 후티 반군을 향한 공습 여부를 두고 갈팡질팡한 끝에 결국 작전을 취소했다고 가디언이 21일(현지시각) 보도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수 주간의 탄원 끝에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에서 후티 반군의 진격을 막아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예멘 내전 참전을 꺼려온 트럼프 대통령은 통화 직후 국방부에 공습을 준비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내 다시 마음을 바꿨다. 뉴욕타임스는 미군이 실제로 폭탄을 항공기에 싣던 단계까지 작전이 진행됐다고 전했다.
좁아지는 사우디의 선택지
로이터는 후티 반군의 이번 공세가 사우디에 수년 만의 가장 뼈아픈 후퇴를 안겼고, 미국 보호의 한계를 동시에 드러냈다고 짚었다.
걸프 지역 한 관리는 로이터에 "후티 반군의 성과를 그대로 두면 장기적 지렛대로 굳어지고, 대규모 군사 대응은 사우디 본토를 위협할 수 있다"며 "사우디의 선택지가 좁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베른트 헤이켈 조지타운대학교 교수는 중동 전문매체인 영국 미들이스트아이와 나눈 인터뷰에서 "사우디는 후티 반군에는 강경하되 이란과 협상하려 한다"며 "사우디의 최종 카드로는 후티 반군에 값을 치르고 단기 평화를 사는 것을 꼽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사우디가 군사적으로 후티 반군을 격퇴하려고 할수록 오히려 중동지역의 분쟁이 장기화될 수 있다는 시선도 나온다.
사우디는 미국의 보호라는 '1차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파키스탄과 튀르키예를 '2차 저지선'으로 삼으려 한다.
앞서 사우디는 올해 8월 튀르키예 및 파키스탄과 메카 공동방위조약을 맺어 '한 나라에 대한 공격은 세 나라 모두에 대한 공격'으로 규정하는 동맹을 맺었다. 튀르키예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군사력 2위에 오를 정도로 강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으며, 파키스탄은 이슬람권 국가 가운데 유일한 핵무기 보유국이다.
하지만 두 나라가 사우디를 위해 이란과 군사 충돌에 나설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튀르키예 이븐 할둔대학교의 이스마일 누만 텔지 교수는 "후티 반군이 사우디에 적대적 행동에 나섰다고 하더라도 튀르키예가 이 분쟁에서 직접 교전국의 역할을 맡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고 영국 매체 내셔널시큐리티뉴스가 전했다.
또한 파키스탄도 미국-이란 전쟁의 중재자 역할을 맡았던 만큼 이란과 정면충돌은 피하려 한다는 게 글로벌 싱크탱크 국제위기그룹의 분석이다.
결국 사우디에 남은 선택지는 후티 반군이나 그 배후인 이란과 외교적 해법을 타진하는 것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야히아 사리 후티 반군 대변인. ⓒ 야히아 사리 대변인 엑스 갈무리
'중동 맹주'에서 '종이 호랑이'로
사우디는 그동안 중동의 실질적 패권국이자 수니파 진영의 맹주를 자처해왔다.
세계 최대 석유기업 아람코의 막대한 자본을 기반으로 국제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초대형 미래도시 프로젝트 '네옴시티'로 한때 한국을 비롯한 각국기업과 재벌들을 줄 세웠던 국가였다.
그러나 올해 9월19일 사우디 수도 리야드의 관문인 킹칼리드 국제공항 인근에서 후티 반군의 미사일 및 드론 공격이 이뤄졌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사우디 정부는 미사일을 요격했다며 사상자나 피해는 없었다고 밝혔지만, 수도 심장부까지 공격이 미쳤다는 사실 자체가 중동 맹주 이미지에 균열을 냈다.
이란과 그 대리세력이 사우디 안방까지 흔드는 모습은 한때 위세를 떨쳤던 사우디가 '종이 호랑이'로 전락했다는 평가를 낳고 있다.
흔들리는 석유 수출로와 안보 동맹
미국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에 따르면 사우디는 홍해 대신 호르무즈 해협 수출을 늘려 9~10월 선적분 약 6천만 배럴을 라스타누라항에서 우회시켰다.
그러나 이는 이란이 봉쇄해온 통로여서, 사우디가 안정적 수출을 위해서는 결국 이란과 타협을 해야 한다는 딜레마를 보여준다.
유엔은 9월 초 이후 예멘에서 최소 12만5천 명이 이재민이 됐다고 밝혔으며, 로이터는 후티 반군과 충돌로 700명 가까이 숨졌다고 집계했다.
미국은 이란과 전쟁이 성과 없이 길어지고 11월 중간선거가 다가오자, 예멘에서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피하고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최소한의 석유수송로 확보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9월 초 "후티 반군이 우리에게 연락해왔고 싸우고 싶어하지 않는다"며 "상황이 매우 잘 풀릴 것이다"고 말했다.
미국의 이런 모습은 사우디를 비롯한 걸프 우방들의 이탈을 부추기고, 에너지와 안보를 맞바꿔온 오랜 동맹 구조를 흔들 수 있다는 우려로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