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라기 공원' 한 편으로 벌어들인 돈이 현대자동차 150만 대 수출한 효과와 맞먹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어록으로 알려진 말 중엔 이렇게 현대차의 자존심을 긁어놓을 만한 것도 있다. 이 말은 어느 정도 와전됐다. 당시 대통령 자문기구인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가 "쥬라기 공원은 1년 만에 8억5천만 달러의 흥행 수입을 올렸다. 이는 자동차 150만 대를 수출해서 얻는 수익과 같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는데 이것이 쥬라기 공원과 현대차 수익을 직접 비교한 것처럼 퍼진 것이다.
1994년 쥬라기 공원은 현대차뿐 아니라 한국 자동차업계 전체를 씹어 먹을 수준의 수익을 올렸다. 사진은 영화 '호프'에 등장한 현대차 구형 모델 '스텔라 88'의 모습. ⓒ현대차그룹
그러나 현대차가 억울할 것도 없었다. 이 말이 퍼진 1994년 쥬라기 공원은 현대차뿐 아니라 한국 자동차업계 전체를 압도하고도 남을 수준의 수익을 올렸다. 그때 한국 자동차업계 전체가 수출한 자동차 수가 64만 대였으니 영화 한 편의 1년 매출이 한국 자동차 산업의 2년 치 매출을 아득히 뛰어넘은 것이다.
지금은 어떨까. 현대차는 이제 어떤 영화와의 비교도 가당치 않을 만큼 거대 기업이 됐다. 현대차의 2025년 매출은 186조 원이 넘는데, 지금까지 영화 한 편이 세운 최고 매출 기록이 2009년 '아바타'가 세운 4조 원이라는 것을 떠올려보면 현대차의 체급이 얼마나 커졌는지 실감할 수 있다.
그래서인가 요즘 현대차가 영화를 대하는 태도에는 여유가 흘러넘치는 것 같다. 최근 영화 '호프'가 개봉했을 때 자동차 액션신이 주목받으면서 현대차가 영화를 후원했다는 것도 알려졌다. 영화 속 자동차는 1980년대 출시된 현대차 클래식 모델 '스텔라 88'로, 호프 제작진은 현대차의 도움으로 외형을 그대로 복원한 뒤 엔진만 최신 '제네시스 쿠페' 엔진으로 개조해서 추격 장면을 완성할 수 있었다.
12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택시운전사'에서도 송강호가 몬 차량이 기아의 옛 모델 '브리사'라는 것이 알려지며 대중의 향수를 끌어올리다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헤리티지 찾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밝히면서 2023년 복원돼 전시된 적도 있다.
이밖에도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언차티드', '앤트맨과 와스프' 등 현대차가 차량을 제공해 적극적으로 홍보 효과를 노린 영화는 여럿이다.
그렇지만 현대차는 아직 영화 홍보의 정수를 누리진 못했다. 감히 그럴 생각을 할 수 없었다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영화에서 기업이 누릴 수 있는 최대 홍보 효과는 아예 브랜드 자체가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포드 V 페라리' 같이 영화의 제목으로 등장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상징성을 갖는 브랜드가 되는 것은 아직 현대차가 밟아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다.
하지만 앞으로 '현대 V BYD(비야디)' 같은 영화가 나오지 말란 법 있나?
현대차가 주인공인 영화가 나온다면 정말 감개무량한 일이다. 생각만 해도 그간 현대차가 숨겨온 영화판 굴욕의 기억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다. 현대차는 과거 영화 007 시리즈에서 벤츠와 BMW가 추격신을 펼칠 때 엑스트라로도 등장하지 못했으며, 분노의 질주 시리즈에서는 주인공의 대사에서 싸구려 차의 대명사로 소개됐다. '우주전쟁'에서는 외계인 레이저에 단 1초 만에 두 동강 나는 차가 있었는데 바로 현대 EF 소나타였다. 웬 악연인지 이것도 쥬라기 공원으로 현대차 기를 죽였던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다.
이랬던 시절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갔고 최근 현대차는 영화계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존재감을 확대하는 중이다. 올해는 미국에서 촬영된 독립 장편영화 '베드포드 파크'에 단순 후원이 아니라 투자자로 참여했다. 손석구와 최희서 배우가 출연한 이 영화는 제42회 선댄스 영화제 미국 드라마 경쟁 부문에서 심사위원 특별상(데뷔 장편상)을 받았다. 2024년에는 현대차가 '밤낚시'라는 13분짜리 단편영화 제작에 직접 뛰어들어 영화제와 광고제에 신선한 영감을 일으키기도 했다.
과연 영화 속 현대차의 위상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에서 주인공 미란다는 벤츠 마이바흐 S-클래스를 타던데 언젠가 미란다가 제네시스 G90을 몰게 될 날도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