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는 이제 단순한 검색 도구가 아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궁금한 것이 생기면 포털 사이트에 검색어를 입력하거나 유튜브 영상을 찾아봤다. 그러나 이제는 가장 먼저 AI에게 질문을 던진다.
주변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던 일도, 인터넷 게시글을 뒤지던 일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AI는 방대한 정보를 종합해 짧은 시간 안에 원하는 답을 척척 내준다.
의사와 변호사의 AI 사용이 늘고 있다. AI 이미지.
그리고 이제는 의사와 변호사도 AI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환자(고객) 앞에서 사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제는 '보조 도구'와 '업무 대행'의 경계가 흐려졌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들은 오랜 시간 축적한 전문 지식을 갖추고 있어 그만큼 비싼 진료비(수임료)를 내고 있는데, 이제 그게 과연 합당한지 의문을 들게 한다.
지난 11일 서울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에서 열린 대한의사협회 제43차 종합학술대회에서 이러한 고민이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AI·초고령 시대 의료계에 필요한 리더십'을 주제로 열린 행사에서는 세계의사회(WMA)와 미국의사협회(AMA) 관계자들이 미래 의료의 방향을 논의했다. 국가와 의료제도는 달랐지만 결론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AI는 의료 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혁신 기술이지만, 의료의 최종 책임과 판단은 어디까지나 의사가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법조계 역시 비슷한 입장을 보였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지난해 6월 협회 인증을 받지 않은 AI 프로그램을 업무에 활용한다는 내용을 광고하는 행위를 제한했고, 소비자를 AI로 직접 연결하거나 AI 이용을 권유하는 광고도 금지했다. 표면적으로는 법률 서비스의 신뢰성을 지키기 위한 조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AI가 변호사의 업무를 일정 부분 대체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결정으로도 읽힌다.
의료계와 법조계가 공통적으로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AI는 전문가를 보조하는 도구일 뿐, 전문가를 대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 같은 원칙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AI를 단순한 보조 수단이 아니라 특정 업무를 사실상 전적으로 맡기는 수준까지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의료 현장에서는 진료 과정에서 AI를 활용하는 사례가 빠르게 늘고 있다. 미국 의사 정보업체 '오프콜'가 6월10일 내놓은 조사 결과를 보면, 의사 1천 명 가운데 약 45%가 의학 전문 AI 챗봇 '오픈에비던스'를 사용하고 있다. 5월에만 3천 만 건에 달하는 질문과 상담이 해당 서비스를 통해 처리됐다. 국내에서는 아직 통계가 나오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병원 현장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실제로 허프포스트 취재에 따르면 30대 환자 서모 씨는 수술 후 부작용을 상담하던 과정에서 담당 의사로부터 "챗GPT를 활용해 보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물론 의사가 AI를 활용하는 것 자체를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의학 논문 수백 편을 몇 초 만에 요약하고 최신 연구를 빠르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의료의 효율성을 높인다. 그러나 환자가 비용을 지불하는 대상은 AI가 아니라 의사의 전문적인 판단이다. AI가 제공하는 답변을 그대로 전달하는 수준이라면 소비자는 점차 "굳이 전문가를 거칠 이유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의사와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의 '무분별한 AI 활용'은 전문직의 권위를 스스로 떨어뜨릴 수 있다.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통증의학과 의사가 챗GPT로 작성한 환자 대상 안내문이 올라와 논란이 됐다. 해당 안내문에는 "환자가 지능이 그렇게 좋지 않은 막일 하시는 분인데 알기 쉽게 설명해줘"라는 프롬프트가 삭제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환자에 대한 설명은 의사의 본분인데, 이를 AI 답변으로 대체한 것이다.
법조계에서도 AI가 만들어낸 '존재하지 않는 판례'를 검증 없이 소장과 준비서면에 인용했다가 패소한 사례가 보고됐다. AI를 활용하면서, 전문가로서 제대로 검증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 주목해야 할 변화는 소비자의 인식이다. 2025년 3월 미국의 헬스케어 플랫폼 테브라가 800명의 미국 환자와 200명의 의료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Z세대의 약 30%가 전문의를 찾기 전에 AI를 통해 스스로 증상을 진단하려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법률 분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2026년 6월 시카고대 연구에 따르면 변호인을 따로 선임하지 않는 '셀프 소송'은 1998~2017년 원고 패소율이 96%에 달할 정도로 승소 가능성이 낮아 비중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생성형 AI 확산 이후 셀프 소송 비율은 5년 전 전체 민사 사건의 11%에서 지난해 16.8%로 증가했다. 연구진은 늘어난 사건 상당수에 생성형 AI가 활용된 것으로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AI가 계속 발전한다면 전문직이 독점해 온 정보 해석과 문서 작성 능력은 더 이상 차별화 요소가 되기 어려울 것이라가 내다본다.
현재 AI는 문서 초안 작성이나 자료 정리 등 반복적 업무의 하중을 덜어주는 보조 도구 정도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생성형 AI의 발전 속도를 고려하면, 조만간 AI는 전문적 판단 영역까지 빠르게 침투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물론 AI가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한계는 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복잡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해석하고, 환자와 의뢰인의 감정을 읽으며, 예상하지 못한 변수 속에서 책임 있는 결정을 내리는 능력은 여전히 인간 전문가의 몫이다.
AI 시대를 맞아 의사와 변호사 등 전문직은 어떻게 살아남을까. 적어도 현재까지 전문직의 경쟁력은 'AI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AI가 대신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데서 나온다는 쪽으로 전문가들의 의견이 모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