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완 우리은행장은 2024년 12월31일 취임사에서 '지켜야 하는 것'과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언급했다. 지켜야 하는 것은 신뢰로, 정 행장은 형식적이 아닌 ‘진짜 내부통제'를 강조했다.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고객 중심‘으로,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고객을 중심에 두고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취임사에서 보이듯이 정 행장 취임 첫 해인 2025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실적 개선’이 아니었다. 정 행장은 내부통제와 신뢰 회복을 앞세웠고, 20년 묵은 계파갈등 타파와 내부 인원에 의한 금융사고 0건 등 첫해에는 그 과제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실적은 대가로 지불됐다. 우리은행은 지난해 '3조 클럽'에서 이탈했고, 4대 은행 가운데 유일하게 2024년보다 후퇴한 순이익을 냈다. 정진완 행장이 임기 마지막 해인 올해에는 실적 측면에서도 연임의 근거를 보여줘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그리 정 행장에게 우호적이지 않아 보인다. 1분기 순이익은 5대 시중은행 가운데 5위로 밀렸고, 서울시금고 탈환에도 실패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 고객 개인정보 1만7551건이 외주업체를 통해 유출된 사안이 불거졌다. '신뢰'와 '고객'이라는 가치마저 임기 말에 흠집이 난 셈이다.
정진완 우리은행장의 임기 마지막 해의 절반이 지나갔다. 내부통제와 계파갈등 청산 등에서 성과를 냈지만, 실적 측면에서는 아쉽다는 평가가 나온다. ⓒ허프포스트코리아
◆ 개인정보 1만7551건 유출, '진짜 내부통제'와 '고객'의 교차점에서 난 사고
8일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우리은행에서 발생한 고객정보 유출 사건의 무게는 유출의 '규모'가 아니라 그 상징성에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우리은행은 3일 정 행장 명의 사과문을 통해 NFT 플랫폼 구축 프로젝트를 수행한 외부 개발업체가 임의 보관하던 개인정보 1만7551건이 업체 직원 과실로 유출됐다고 밝혔다.
유출 항목은 연계정보(CI)와 이용자 닉네임으로, 금융거래 정보는 포함되지 않았다. 현재까지 확산·악용 사례도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가 조사에 착수한 만큼 피해 여부 등이 확정된 사안은 아니다. 금감원 역시 해당 사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적이 흔들려도 정 행장에게는 첫해에 세운 내부통제라는 성과가 남아 있었다. 이번 유출은 바로 그 성과에 금을 낸 사건이다. 내부통제는 조직 안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외주업체 관리는 그 통제가 조직 바깥 경계선에서도 유지되는지를 묻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 말부터 분야를 가리지 않고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이어지며 이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매우 매서운 상황에서 발생한 시중은행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인 만큼, 규모와 관계없이 여론은 차가울 가능성이 높다.
정 행장이 내부통제와 함께 내세웠던 '고객과의 상생'이라는 가치와도 충돌하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상징적 타격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 취임 첫해에 이어 올해 1분기에도 흔들린 실적
이 사고가 임기 말 평가에서 무겁게 읽히는 배경에는 역시 '실적'이 자리잡고 있다. 지난해 KB국민·신한·하나 등 주요 경쟁 시중은행들이 모두 순이익 성장을 이뤄낸 반면, 우리은행은 홀로 전년 대비 14.2% 급감한 2조6070억 원의 당기순이익을 거두는 데 그쳤다. 4대 은행 중 유일하게 순이익이 3조 원 아래로 내려간 것이다.
올해 1분기 성적표 역시 만회와 거리가 멀었다. 우리은행의 2026년 1분기 당기순이익은 5312억 원으로 지난해 1분기보다 16.2% 감소했다. 단순한 이익 감소보다 더 뼈아픈 것은 다른 시중은행들과의 '상대적 비교'다. 5개 시중은행 가운데 우리은행을 제외한 4개 은행은 모두 1분기 순이익이 2025년 1분기보다 성장했다. 그 결과 우리은행은 NH농협은행에 분기 순이익이 역전당하며 시중은행 5위로 밀려나기도 했다.
물론 하반기 반등 여지는 남아 있다. 다만 정 행장이 은행장 후보로 단독 추천된 시점이 2024년 11월이었던 만큼, 올해 연임 심사도 연말께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반등을 숫자로 입증할 수 있는 구간은 사실상 3분기 실적까지다. 연간 실적이 확정되기 전에 거취가 갈릴 수 있다는 점에서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관측이 나온다.
◆ 서울시금고 탈환 실패, 상징과 실리를 모두 놓쳤다
기관영업에서도 상징적 패배가 있었다. 서울시는 6월30일 신한은행과 차기 시금고 약정을 체결했다. 2027년부터 2030년까지 4년간 서울시 자금을 관리하는 계약이다. 우리은행은 1금고 평가에서 963.184점으로 신한은행(977.104점)에 14점 차 2위에 그쳤다. 2금고에서는 국민은행(920.048점)에도 밀린 906.832점으로 3위를 기록했다.
서울시금고는 우리은행에 각별한 자리다. 대한천일은행(조선상업은행) 시절인 1915년 경성부금고 업무를 맡은 이래 104년간 사실상 독점 운영해왔으나, 2018년 신한은행에 1금고를 내줬고 2022년에는 2금고마저 넘겨줬다. 이번 수주전은 8년 만의 탈환 기회였고, 우리은행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부행장 직속 태스크포스(TF)까지 꾸리며 사활을 걸었지만 결국 탈환에 실패했다.
상징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울시의 올해 예산은 51조4778억 원으로 전국 지방자치단체 금고 중 최대 규모다. 1금고(약 47조 원)를 맡으면 대규모 저원가성 예금을 유치할 수 있고, 수천 명의 시 공무원과 산하기관·협력업체로 거래가 확장되는 부수 효과가 따른다. 향후 자치구 금고 경쟁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는 발판이기도 하다.
이는 정 행장이 올해 내건 경영 목표와도 직결된 사업이었다. 정 행장은 1월 경영전략회의에서 올해를 '제2의 도약'의 해로 정하고 제1 과제로 고객 기반 확대를 내세웠다. 서울시금고는 바로 그 고객 기반을 통째로 가져올 수 있는 일이었고, 결과적으로 그 기회를 14점 차로 놓친 셈이다.
◆ 임종룡 2기의 첫 계열사 인사, 연임 가능성 아예 닫을 수 없는 이유
다만 정 행장의 연임 여부 결정되는 자리가 임종룡 회장의 2기 첫 인사라는 점에서 정 행장의 연임 가능성을 아예 닫을 수는 없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정 행장의 거취는 연말 자회사대표이사후보추천위원회(자추위)에서 판가름 나는데, 임 회장의 2기 체제가 올해 3월 공식 출범했다는 것을 살피면 올해 말 계열사 CEO 인사는 임 회장 2기가 맞는 사실상 첫 계열사 수장 인사다.
연임의 명분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경영 연속성이다.
우리은행은 그룹 순이익의 대부분을 책임지는 핵심 계열사다. 2기 출범 첫해에 그룹의 중추부터 흔드는 것은 임 회장에게도 부담스러운 선택이다. 은행장이 교체되면 조직 개편과 임원 인사가 뒤따르고, 정 행장이 1년간 다져온 조직 안정화 작업이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과제의 연결이다. 정 행장이 임기 첫해에 이룬 계파갈등 정리와 내부 인원에 의한 금융사고 0건이라는 성과는 임 회장 체제에서 우리은행에게 부여된 과제이기도 했다.
임 회장 입장에서는 자신이 발탁해 어려운 숙제를 풀어낸 인물에게, 이제 그 성과를 실적으로 연결시키는 2기의 목표를 다시 한 번 맡기는 그림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