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에서 불치병을 앓는 12세 미만 아동에 대한 안락사가 처음으로 시행됐다. 2024년 안락사 허용 범위를 12세 미만으로 확대하는 법규가 통과된 이후 처음이다. 이처럼 세계적으로 안락사 제도를 둘러싼 논의가 심화하는 가운데 되는 한국은 유독 아무런 변화가 없다.
병상에 누워 있는 노인. AI 이미지.
23일(현지시각) 네덜란드 공영방송 NOS 등에 따르면 소피 헤르만스 보건장관은 최근 의회에 보낸 서한에서 지난해 말 안락사 감독위원회에 12세 미만 아동 안락사 사례 1건이 보고됐다고 밝혔다. 해당 제도는 불치병으로 극심한 고통이나 고뇌를 겪고 있으며 이를 완화할 합리적인 대안이 없는 경우, 환자가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취지로 마련됐다.
네덜란드는 2002년 세계 최초로 적극적 안락사를 합법화한 국가다. 네덜란드는 1970년대부터 안락사를 사실상 비범죄화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정비해 왔으며, 2002년 성인 안락사를 포괄적으로 합법화했다. 이후 16~17세 청소년은 부모와의 협의 아래, 12~15세는 부모 동의 아래 안락사를 받을 수 있도록 범위를 넓혀 왔다. 현재 네덜란드 전체 사망자 가운데 안락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5~6% 수준에 이른다.
한때 이는 네덜란드만의 특수한 사례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들어 안락사를 둘러싼 논의는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벨기에는 2003년 의사가 직접 약물을 투여해 사망에 이르게 하는 적극적 안락사와 의사가 약물 처방·조력을 하고, 환자가 스스로 투약하는 조력존엄사를 합법화했다. 이후 제도 운영 경험이 축적되면서 성인 말기 환자 중심이던 논의는 점차 다양한 사례로 확대되고 있다. 스페인 역시 2021년 안락사를 합법화한 뒤 같은 해 6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남유럽 국가의 합류는 안락사가 더 이상 일부 서유럽 국가에만 국한된 정책 실험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국가별 세부 기준과 적용 범위에는 차이가 있지만, 적어도 존엄한 죽음을 제도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꾸준히 진전되고 있다.
반면 한국의 상황은 완전히 대조적이다. 국내에서 안락사 논의는 사실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오랫동안 이어져 온 가족 중심 문화와 생명 존중 가치, 그리고 경제적·사회적 압박 속에서 취약계층이 죽음을 선택하도록 내몰릴 수 있다는 우려가 지목돼 왔다. 안락사를 개인의 자기결정권 문제로 보기보다 사회적 위험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국민 인식은 과거와 달라지고 있다.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윤영호 교수 연구팀이 2021년 3월부터 4월까지 만 19세 이상 국민 1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안락사 또는 조력존엄사에 찬성한다는 응답은 76.3%에 달했다. 찬성 이유로는 남은 삶의 무의미함(30.8%),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권리(26.0%), 고통 경감(20.6%), 가족의 고통과 부담 감소(14.8%) 등이 꼽혔다. 의료비와 돌봄으로 인한 사회적 부담(4.6%), 인권 보호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이유(3.1%)도 뒤를 이었다.
또한 ‘광의(廣義)의 웰다잉’을 위한 체계와 전문성에 대한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약 85.9%가 찬성했다.
‘광의의 웰다잉’은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해 호스피스 및 연명의료 결정 확대와 함께 독거노인 공동 부양, 성년 후견인, 장기 기증, 유산 기부, 인생노트 작성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안락사를 둘러싼 사회적 인식이 단순한 금기나 거부의 단계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논의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가 강했다면, 이제는 찬반을 떠나 제도 도입 가능성과 조건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결정하는 정치권의 움직임은 더디기만 하다. 국회에서는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24년 6월 조력존엄사에 관한 제정안을 다시 발의한 것이 가장 최근의 시도다. 하지만 한국에서 안락사 관련 법률이 제정된 뒤 점진적으로 허용 범위가 확대된 사례는 아직 없다.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무의미한 연명의료에 대해 거부를 선택할 수 있는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된 이후 적용 범위와 절차가 일부 보완된 것이 사실상 유일한 변화에 가깝다. 현재 분위기를 감안하면 조력존엄사 제정안 역시 실제 입법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여기에는 정치권 특유의 계산법이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안락사 문제는 생명윤리라는 철학적 논쟁의 영역을 넘어, 자칫 표를 잃을 수 있는 민감한 가치 갈등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권은 원론적으로는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거나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보건의료계와 종교계, 시민단체 등의 반발 가능성을 의식해 입법 논의를 뒤로 미뤄 왔다.
의료계는 오진 가능성과 환자 보호 문제를 우려하며 신중론을 펴고 있다. 종교계 역시 생명의 존엄성을 이유로 안락사 제도화에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이다. 반면 일부 시민사회와 환자단체는 자기결정권과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강조한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만큼 정치권 입장에서는 적극적으로 추진할 유인이 크지 않다.
결국 한국 사회의 안락사 논의가 정체된 이유는 단순히 윤리적 보수성 때문만은 아니다. 사회적 비난을 감수하며 논의를 이끌 정치적 주체가 부재한 가운데, 현상 유지가 가장 안전한 선택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그 결과 환자의 자기결정권이라는 문제는 지금도 외면 받고 있다.
하지만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현실은 이러한 논의를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만들고 있다. 현재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3~84세로 세계 최고 수준에 속한다. 반면 질병이나 부상 없이 건강하게 생활하는 건강수명은 약 65~70세 수준에 머물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