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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아 대만 영화감독 차이 밍량(蔡明亮)이 연출한 「하류」(河流, The River, 1997)를 봤다. 한 가족이 등장한다. 예순 중반쯤 되었을까. 은퇴한 노년의 사내는 가끔 맥도날드에서 동년배 친구들을 만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일과가 없다. 사우나에 자주 간다. 사우나 안에는 개인 휴식공간으로 자그마한 방들이 있는데 양쪽으로 늘어선 방 앞의 복도는 오가는 남자들로 북적인다. 그들은 노크도 없이 급히 문을 열었다 닫는다. 늙은 몸의 사내는 그 방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거절하기도 한다. 밥은 부엌 식탁에서 혼자 먹는다. 자그마한 식탁 위에는 언제나 전기밥솥이 놓여 있다. 현관 옆에 붙은 자그마한 문간방에서 혼자 지내는데 천장에서는 양동이를 여러개 받쳐야 할 만큼 물이 뚝뚝 샌다. 나중에는 아예 쏟아져 내린다. 윗집은 잠겨 있다. 같은 집에 사는 아내와 아들은 그 방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는 듯하다.

갈라진 가족

아내는 맥도날드에서 일하고, 따로 만나는 남자가 있다. 밥은 역시 식탁에서 혼자 먹는다. 안방 침실에서 혼자 멍하니 포르노를 보기도 한다. 아들 샤오강(차이 밍량의 페르소나라 할 만한 리 캉셍李康生이 연기한다)은 청년 백수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예전 여자친구를 따라 영화 촬영장에 갔다가 엉겁결에 마네킹 시신 대역을 한다. 거기는 도시의 더러운 하수가 강으로 흘러드는 곳이다. 스쿠터를 타고 타이페이 시를 하릴없이 돌아다니던 샤오강은 집 앞 골목에서 넘어져 목을 다친다. 목은 좀처럼 낫지 않고 영화 내내 그는 목을 한쪽으로 기울인 채 고통에 겨워 신음한다. 아버지가 드나드는 사우나 앞에서 샤오강이 망설이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그도 역시 밥은 식탁에서 혼자 먹는다.

이렇다 할 극적인 사건이 없는 영화에서 목 치료를 위해 부자가 함께 지방 소도시의 심령술사를 찾아가는 1박2일의 여행이 후반부에 전개된다. 여행 중 모텔에서 나와 소도시 사우나에서 조우한(샤오강의 입장에서는 조우인지 분명치 않다) 부자 간에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긴 한다. 그러긴 해도 이미 쩍쩍 갈라진 채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지워나가고 있는 이들 가족의 일상에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어떤 변화가 일어날 조짐은 없어 보인다. 영화는 부자가 모텔에서 맞은 아침, 도시의 소음이 들려오는 열린 창밖을 보여주며 끝난다.

이야기로 환원되지 않는 시간들 | 차이 밍량의 「하류」를 보고

요약되지 않는 이야기, 환원되지 않는 시간

그런데 영화 「하류」를 이렇게 요약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일까. 이 영화에는 이야기되거나 요약되기 힘든 시간과 장면이 너무 많다. 이 가족이 사는 집을 생각해본다. 전기밥솥과 그릇 몇개가 덜렁 놓인 식탁의 삭막한 풍경, 현관과 거실을 채우고 있는 설명하기 힘든 공기, 그 사이를 홀로 오가는 인물들의 처량한 움직임은 감독이 선택한 고유한 영화적 시선과 질감 안에서 현전한다. 그것들은 그냥 하나의 느낌의 덩어리로 다가온다. 한번 그 자리에 놓인 뒤 움직인 적이 없는 듯한 볼품없는 가구나 텅 빈 벽도 그 느낌의 덩어리에 합류한다. 그러나 합류는 조화롭다기보다 우연적이고 불가피한 느낌을 준다. 액션배우로 유명한, 「안녕, 용문객잔」(2003)의 미아오 티엔(苗天)이 연기한 노쇠한 사내의 몸. 한때 건장했던 체구는 배불뚝이 체형으로 바뀌었고, 피부는 검고 메마르고 쭈글쭈글하다. 사우나의 작은 방에 벌거벗고 누워 누군가를 기다리는 욕망하는 몸. 그리고 목을 가누지 못하는 샤오강은 영화 내내 고통에 짓눌린 찡그린 얼굴로 아, 아, 신음을 토한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꾸역꾸역 밥을 먹는 장면을 영화는 오래 보여준다.

폭우가 퍼붓는 날 임시변통으로 막아놓은 천장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방에서 넘쳐흐른 물은 거실로 흘러들고 혼자 집에 있던 아내는 그제야 사태를 알아챈다. 빗속에 베란다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간 그녀는 물이 콸콸 나오고 있는 수도꼭지를 발견한다. 텅 빈 집은 이사 뒤 치우지 않은 쓰레기로 어지럽다. 불쑥 틈입한 재앙에 의미나 상징이 있을 리 없듯, 수도를 잠그는 아내의 손길은 공허하고 막막해 보인다. 강의 흐름[河流]으로 쳐도 여기는 하류(下流)쯤일 것이다. 그 폭우의 밤, 지방 소도시에 있던 부자는 사우나의 좁은 방에서 만났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모텔의 열어젖힌 창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그저 아침의 행동일 것이다. 부자가 보냈던 길고 무거운 밤의 시간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어쨌든 밤은 지나고 다시 아침은 왔다. 심령술사의 말대로 신이 찾아와주었으니, 이제 타이페이 병원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으면 될 일이다.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설명할 길 없는 착잡한 감흥에 휩싸인 채 영화관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현실을 일으키는 영화

어떻게 해도 복기가 잘 안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이렇게 말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흔들렸고, 그 여진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많이 남아 있다. 그건 범박하게 말해 이 영화가 포착해낸 삶의 강렬하고 특별한 리얼리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리얼리티는 흔히 말하듯 핍진성의 문제만은 아닌 듯하다. 「하류」의 화면에 흐르고 있는 것들은 우리가 살았으되 살지 않은 시간이며, 우리도 모르게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 시간이다. 혹은 가능태의 시간이다. 리얼리티라면, 그 시간의 역능(力能)과 결을 포함하는 리얼리티일 테다. 일상의 감각과 맨눈으로는 좀체 가시화되지 않는 세계 말이다. 각진 말과 개념, 진부한 감각이 서둘러 닫아버리는 세계. 어떤 영화는 그렇게 눈앞의 현실 안에 포개지고 접힌 시간과 감각의 층을 일깨운다. 지워지고 망각된 현실을 일으킨다.

관객이 호응하는 다양한 층위의 영화가 있다. 차이 밍량의 영화는 소수의 관객이 찾는 영화라 할 만하다. 그런 사정도 더 악화되었는지, 지금은 아예 극장 개봉 방식을 포기하고 미술관 등지에서 상영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는 소식도 들은 듯하다. 착잡하지만 세상의 흐름이 그렇다면 그런 제약 역시 감독이 감당해야 할 몫일 테다. 잘 모르겠다. 아직도 이런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 서울 시내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는지.

편집진을 개편한 『문학동네』 봄호에는 깊이있는 영화비평 글들이 실려 있다. 문학 중심 계간지에서 조금 성격을 바꾸는 듯하다. 흔히 문학과 영화는 '이야기' 혹은 '서사'라는 공유 지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이 공유 지점은 종종 도구적으로 오해되고 있는 듯하다). 매체나 미학의 성격은 다르지만 현실의 창조적 제시, 타자성의 윤리 등 대화할 지점은 많을 테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비되는 이야기(콘텐츠)' 혹은 '이야기로의 환원'을 거부하는 지점에서 서로 만날 영역도 있지 않을까. 문학과 영화 사이의 비평적 대화가 깊어지길 기대해본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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