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25일. 인천공항 입국장의 수많은 카메라 앞에 한 남자가 섰다. 덥수룩한 수염에 문신 가득한 팔. 수갑을 찬 채 검은색 모자를 깊게 눌러쓴 그는 필리핀 사탕수수밭의 살인자이자 텔레그램 마약왕 ‘전세계’라 불리던 박왕열이었다.
필리핀에서 교민 3명 살해, 탈옥, 국내 마약 유통 등을 일삼으며 '마약왕'으로 불리던 박왕열 씨가 25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국내로 송환되고 있다. 2026.3.25 ⓒ연합뉴스
뉴스는 드디어 거물을 잡았다며 떠들썩했다. 기사들은 그의 에피소드를 앞다투어 보도했다. 필리핀 감옥에서의 호사스러운 생활과 마약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수익에 집중했다. 심지어 그의 눈빛에서 마약 투약 흔적을 찾으려는 자극적인 보도도 잇따랐다. 박왕열의 이력은 넷플릭스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다. 필리핀에서 수산물 유통을 하던 그가 수감 중 스마트폰 하나로 한국 마약 시장의 ‘왕’이 됐다.
마약왕의 송환 소식에 누군가는 이제 마약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며 안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일종의 기시감을 느꼈다. 2023년에 출간한 <나는 왜 마약 변호사를 하는가>에서 나는 ‘호랑이 사냥’ 이야기를 썼다. 사냥꾼이 정글의 왕인 호랑이를 잡아내도 정글은 고요해지지 않는다. 호랑이가 사라진 자리에는 표범이 들어오고 하이에나가 설친다.
마약 시장도 마찬가지다. 마약왕 한 명이 사라진다고 대한민국 마약 유통의 혈관이 멈추지는 않는다. 박왕열 이전에도 자칭 마약왕들은 여럿 있었다. 그들은 텔레그램이라는 익명의 무대 뒤에서 현대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유통망을 구축했다. 구매자와 판매자를 연결하고 암호화폐로 자금을 세탁하는 플랫폼은 이제 누구나 흉내 낼 수 있는 시스템이 되었다.
25일 오전 경기도 의정부시 경기북부경찰청에서 '마약왕'으로 불리던 박왕열이 압송되고 있다. 2026.3.25 ⓒ연합뉴스
실제로 내가 만나는 구치소의 젊은 의뢰인들은 박왕열이 누군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마약은 거창한 마약왕이 내리는 하사품이 아니다. 클릭 몇 번이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배달 상품일 뿐이다. 마약왕이 송환되던 날에도 내 휴대전화는 쉬지 않고 울렸다. “변호사님, 텔레그램으로 산 약이 걸린 것 같아요.”, “물건을 수거하다가 CCTV에 찍혔는데 어떡하죠?” 박왕열이 수갑을 차고 연행되는 순간에도, 어느 빌라 우편함에는 ‘던지기’ 수법으로 숨겨진 마약이 놓여 있다.
호랑이가 잡혔지만 정글의 밤은 여전히 소란스럽고 위험하다. 그 이유는 마약의 먹이사슬이 건재하기 때문이다. 투약자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울먹인다. 나는 그들의 말을 절반만 믿는다. 그들의 의지를 불신해서가 아니다. 마약이라는 괴물이 인간의 의지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박왕열 한 명을 처벌한다고 해서 마약의 먹이사슬이 끊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급자를 처벌해도 중독이라는 ‘수요’가 살아있는 한 정글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마약왕 잡기’라는 이벤트에만 열중했다. 정작 정글 속 늪에 빠진 이웃들을 끄집어 올리는 일에는 인색했다. 대한민국의 마약 중독 치료 시스템은 마약왕 송환 이전과 비교해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실제로 국내 마약 치료 보호 기관으로 지정된 병원 중 실적이 전무하거나 10명 미만인 곳이 70%를 상회한다. 만성적인 예산 부족과 비현실적인 치료 단가로 인해 병원들이 사실상 환자 받기를 기피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서글픈 성적표다.
마약왕의 빈자리는 또 다른 예비 마약왕들이 노리고 있다. 그들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수사기관의 수갑만이 아니다. 마약이 더 이상 돈이 되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즉, 중독자들이 치료를 통해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회복의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수요가 사라지면 공급도 설 자리를 잃는다.
호랑이를 잡는 법은 이제 충분히 안다. 이제는 정글 자체를 건강하게 돌보는 법을 고민할 때다. 그래야만 마약왕이 아예 발붙일 수 없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