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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하다 보면 가끔 그런 일이 있다. 뭔가 사소한 것들이 박자가 안 맞아 꼬이면서 일 전체가 불만족스럽게 망쳐지는 경우 말이다. 따지고 보면 명료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일은 꼭 막상 해보면 이상하게 늪에 빠진 것처럼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그날도 그랬다.

[Dr. 허지만의 진료실 이야기] 가슴 아픈 말 '유산', 절반의 확률 앞에서 무력해지는 의사의 고뇌
유산은 의사도 예측하기 힘든 운명의 영역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AI 이미지

어느 당직 근무 날 심야에 임신 6주 산모가 내원했다. 차트를 보니 이틀 전 외래에서 배아 심장박동을 확인하였고, 특이 소견 없어 평범하게 2주 뒤 초음파 재확인을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오늘 자기 전 볼 일을 보는데, 피가 뚝뚝 떨어졌고, 그래서 기분 탓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랫배도 사르르 아픈 것 같아 놀라서 왔다고 하였다.

그녀는 난임 시술까지 하진 않았지만, 나름 여러 차례 자연 임신을 시도하여 마침내 성공한 소중한 임신이라며 매우 걱정했다. 병원에 도착할 때부터 이미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울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진찰해 보니 피는 멎어 있었다. 초음파를 보니 배아의 심장박동도 정상 범위로 잘 뛰고 있었고 자궁 안의 피고임도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즉, 당장 뭔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만한 특이 소견은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산모는 기다리지 못하고 다그쳤다.

"선생님 우리 아기 괜찮나요? 어떻게 된 건가요!"

임신 초기 질 출혈은 20~25%의 산모가 경험하는 비교적 흔한 증상이다. 그러나, 이것이 아기집이 자궁에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결국 유산으로 가는 과정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임신 초기 질 출혈을 '절박유산'이라고 진단한다. 절박유산 산모 중 대략 절반에서 결국 유산으로 진행된다고 하니 걱정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걱정해도 결론은 오직 시간만이 알려줄 것이다. 의사가 산모에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지금은' 괜찮다는 말과 '나중은' 모른다는 말뿐이다. 어찌 되었든 지금 큰 이상 소견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므로 울고 있는 산모를 격려해 주었다.

"현재 소견으로는 다행히 큰 이상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유산의 위험성이 있으니, 집에 가셔도 절대 안정하시고 피가 또 나면 즉시 오셔야 해요."

그렇게 산모를 잘 달래어 보냈다. 필요한 처치는 기본적으로 다 한 평범한 진료였기 때문에 여느 상황이라면 기억에 인상 깊게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틀 뒤. 평소처럼 외래 진료를 보는데, 진료실 밖이 소란스러웠다. 문밖에서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과 남자의 불을 토하는 듯한 고함이 들렸는데, 어찌나 큰지 진료실 안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리 시끄러운 거지? 설마 나한테 용무가 있는 건 아닐 거야.’

설마설마했던 예감은 꼭 맞아떨어지곤 한다. 소란을 피운 이들은 내 진료실 문을 부수듯 열고 들이닥쳤다. 이전에 봤던 그 임신 6주 절박유산 산모 부부였다. 그들이 화가 난 이유를 아직 듣지 못했으니 당혹스러웠지만, 일단 침착하게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신 건지요. 그간 별일은 없었나요?" 

남편은 다짜고짜 화를 내었다.

"뭐 별일이 없어? 그래! 별일 아주 많이 있었지! 이 살인마야!"

아니 살인마라니! 난데없이 뺨부터 맞은 기분이라 화가 나고 심장이 요동쳤지만, 일단 어떻게 된 일인지 차분하게 상황 설명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일단 부부의 말을 들어보니 산모는 결국 유산하고 말았다고 했다. 그들이 화를 낼 만한 이유가 달리 없을 테니 그건 예상한 바였으나, 문제는 시기였다. 그날 밤 진료를 보고 몇 시간 뒤인 다음 날 새벽에 산모는 또 하혈을 했다고 했다. 분명 출혈이 발생하면 다시 오라고 말했건만, 그들은 다른 병원에 갔다. 분명 ‘괜찮다’라고 들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출혈이 나니 필자가 미덥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고 거기서 결국 '유산'을 진단받았다.

"당신이 뭐라고 그랬어!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근데 이게 괜찮은 거야? 괜찮은 거냐고!"

그때 분명 그들에게 괜찮을 것이라고만 말하지 않았다. 유산의 위험도 같이 설명하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있다고 입증할 방법은 없었다. 어쩌면 ‘아’ 다르고 ‘어’ 다른 말의 뉘앙스 차이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너무 비관적으로만 설명했다가 말이 씨가 된다고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지 우려한 게 자칫 과한 희망을 줬던 것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의학적으론 같은 내용, 동일한 결론인데도 환자는 저마다 천차만별로 받아들인다. 그저 객관적인 정보만 전달하면 되는 게 아니라서 의료는 참 어렵다.

의사로서 추가적인 설명을 해줄 수는 있다. 예를 들어 “보통 ‘출혈이 유산의 원인이다’라고 인과관계를 잘못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유산의 가장 흔한 원인은 임신 초기의 태아 염색체 이상이라 어쩌면 운명은 수정할 때부터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내용은 사실이니까. 그러나 그런 설명은 미리 말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비록 결과는 바뀌는 게 없다고 해도 말이다. 여러모로 생각해 봐도 부부가 이미 화를 내러 온 상황에선 의사가 무슨 설명을 해도 변명이라고 받아들일 것 같았다.

결국 의사도 억울하지만 환자의 화를 오롯이 받아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사그라들 여지가 없어 보이는 오해의 불길을 마주하며 좌절감을 느꼈다. 과거의 필자가 이런 미래를 예측하고 피할 수 있었을까? 아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때로는 파도와 폭풍을 그저 맞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운명론을 떠올리곤 한다. 

글쓴이 허지만 산부인과 전문의는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안산병원에서 산모입원 전담 임상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미래아이산부인과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임신부터 출산까지 따라가며 시기마다 여성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고자 한다. 아울러 의사로서 환자를 진료하면서 느낀 생각과 도덕적 딜레마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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