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 수 AMD 최고경영자(CEO)가 첫 한국 방문에서 최수연 네이버 대표이사를 가장 먼저 만났다.
두 사람은 테크 기업에 흔치 않은 여성 수장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공통점도 적다. 시장 영향력 차이도 크다. 그럼에도 리사 수 CEO가 직접 방한해 최수연 대표를 만난 데엔 AMD가 느끼는 위기감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다. 네이버가 위기에 처한 AMD를 구할 파트너가 될 수 있을지 관심이다.
리사 수 AMD 최고경영자(왼쪽)가 한국을 방문해 가장 먼저 최수연 네이버 대표이사(오른쪽)를 만나 함께 네이버 사옥을 살펴보고 있다. ⓒ 네이버
네이버는 18일 리사 수 CEO와 최수연 대표가 경기 성남시 판교에 위치한 네이버 제2사옥 1784에서 'AI 생태계 확장 및 차세대 인프라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 MOU는 네이버의 자체 AI 언어 모델인 '하이퍼클로바X(HyperCLOVA X)'에 최적화된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 연산 환경 구축을 위한 기술 협력을 강화하고, 안정적 AI 모델 인프라를 고도화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네이버는 지난해부터 데이터 센터 구축에 열을 올리고 있어 AMD의 AI 가속기가 절실하다. 네이버의 2025년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네이버는 전년(4823억 원)의 2배에 달하는 1조1595억 원을 '서버 및 비품' 항목에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사 수 CEO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첫 일정으로 이날 오전 11시 네이버 사옥에 도착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에서 리사 수 CEO는 "세계 최고 수준의 AI 역량과 클라우드 플랫폼을 갖춘 네이버는 AMD의 차세대 AI GPU 기술을 혁신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최적의 파트너다"며 "양사가 함께 전 세계 연구자와 기업, 개발자들이 신뢰할 수 있는 개방형 AI 생태계를 구축해 나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리사 수 CEO가 첫 일정으로 최수연 대표를 만나는 게 의외라는 반응도 나온다. AMD는 시가 총액이 3205억 달러(약 477조2천억 원)에 달해 나스닥 기준 16위에 위치한 글로벌 초거대기업인 반면 네이버는 시총 35조 원(약 235억 달러)으로 나스닥 150위 정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시총만 13배 이상 차이나는 두 기업 수장의 만남이 성사된 건 양사 모두 급변하는 AI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한 탓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AMD의 경우 GPU를 포함한 AI 가속기 시장에서 엔비디아에 크게 뒤쳐지고 있다.
시장 조사기관 존페디리서치(JPR)에 따르면 생성형 AI 혁명을 일으킨 오픈AI의 챗지피티(ChatGPT)가 출시된 2022년 4분기 AI 데이터센터 점유율은 엔비디아가 46%로 1위를 차지했고 인텔이 40%, AMD는 14%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그 뒤 3년 만인 2025년 4분기에는 인텔의 점유율이 34%포인트로 크게 줄어 6%로 내려앉았다. 그러나 AMD는 인텔의 파이를 효과적으로 흡수하기는커녕 기존에 차지하고 있던 점유율도 내주고 2022년 4분기의 절반인 7%에 그쳤다. 엔비디아는 86%로 압도적 1등을 차지했다.
네이버의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네이버는 2021년 5월25일 자체 AI 언어 모델인 '하이퍼클로바'를 야심차게 내놓았다. 네이버가 가진 막대한 한국어 데이터를 학습해 한국어 처리에 강점을 지녔다고 주장했다. 대화형 AI 서비스인 '클로바 엑스(CLOVA X)'도 출시했다.
하지만 네이버의 홍보가 무색하게도 하이퍼클로바는 대중에게 "차별점이 없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소버린(국가 주권) AI를 표방하며 정부의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 사업에도 참가했지만 중국의 알리바바에서 개발한 큐웬(Qwen)을 사용해 독자성 부족으로 1차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클로바 엑스는 오는 4월9일 서비스가 종료된다.
네이버의 '하이퍼클로바X'를 활용한 대화형 AI 서비스 '클로바X'는 4월9일 서비스를 종료한다. ⓒ 네이버
이처럼 AI 시대에 뒤쳐진 두 기업은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AMD는 플랫폼 경쟁력에서 엔비디아에 크게 밀리고 있다. 엔비디아는 2006년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개발한 쿠다(CUDA) 플랫폼을 바탕으로 AI 경쟁에서 크게 앞서나갔다. 쿠다 플랫폼이 딥러닝 기술 발전의 밑바탕이 됐고 현재 대부분의 AI 모델은 쿠다 플랫폼 위에서 학습·가동한다. 신생 AI 기업들이 엔비디아 대신 AMD의 AI 가속기를 구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네이버는 AMD에게 최적의 고객이 될 잠재력이 있다. 네이버는 야후, 구글 등 해외발 대형 포털사이트들을 모두 이겨내고 한국 검색 시장을 장악한 기업이다. 시장조사업체 인터넷트렌드에 따르면 2025년 국내 검색 점유율은 네이버가 평균 62.86%로 단독 1위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2위인 구글은 같은 기간 29.55%를 기록했다.
네이버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자체 개발 AI 모델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대규모 이용자 서비스에 이르는 전 과정을 독자 기술로 연결할 수 있는 AI 풀스택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AMD에게는 이처럼 강력한 독자적 개발 생태계 구축 능력을 지닌 고객이 필요한 것이다.
네이버 입장에서도 AMD는 훌륭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 네이버는 엔비디아에 줄을 선 구글·메타 등 우량 기업에게 자본과 중요도에서 모두 밀린다. '베라 루빈'과 같은 엔비디아의 최신 AI 가속기를 제때 충분히 공급받는 것도 벅찬 상황이다.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의장(왼쪽)과 최수연 네이버 대표이사(오른쪽)이 2024년 6월25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 네이버
최수연 대표가 2024년 6월부터 지난해 5월까지 몇 차례 젠슨 황 엔비디아 CEO를 만나고 1월에는 네이버클라우드가 엔비디아의 B200을 4000장 갖춘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선두주자들을 따라잡기는 갈수록 어려워진다.
김유원 네이버클라우드 대표는 지난해 11월 엔비디아가 GPU 6만 장을 공급하기로 한 것을 두고 "자체 AI 서비스를 구현하려면 6만 장도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AMD는 네이버의 AI 가속기 수요를 충족하기에 적절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최수연 대표는 "AMD와 협력은 네이버의 기술적 다양성을 확보하고 AI 인프라 경쟁력을 높이는 데 의미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며 "양사는 네이버클라우드와 AI 서비스 전반에서 AMD 플랫폼의 활용 가능성을 함께 넓혀가며 차세대 기술 스택과 서비스 구현을 위한 협력을 지속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리사 수 CEO는 최수연 대표와 만남을 마친 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로 이동해 전영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을 만나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인 HBM4 공급망 논의를 이어나갈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의 만찬도 예정돼 있다.
리사 수 CEO는 메사추세츠공대(MIT) 출신으로 엔지니어 출신이다. 2014년 AMD의 CEO로 취임해 중앙처리장치(CPU)인 라이젠(RYZEN) 시리즈의 성공으로 AMD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최수연 대표는 제1회 변호사시험과 뉴욕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법조인이다. 특이하게도 변호사가 되기 전부터 NHN(현 네이버)에서 근무하며 실무 경험을 쌓았고 2019년 네이버에 재입사해 2022년 네이버 대표이사로 선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