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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에 임하는 나의 자세는 파키아오보다 메이웨더에 가깝다. 이기기 위한 공격보다는 지지 않기 위한 방어에 주력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옷을 잘 입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나는 그 정도로 야심이 큰 사람은 아니다. 그저 못 입는 수준만 면한다면 충분히 스스로에게 만족할 수 있다. 실패를 최소화하기 위해 나름대로 세워둔 규칙도 있는데 요란한 프린트나 화려한 색상은 되도록 자제한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알록달록해도 귀엽던 시절은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을 때 이미 끝났으니까. 물론 가끔은 불문율에 예외를 두고 싶은 경우도 발생하곤 한다. 이를테면 데릭 시앤프랜스의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사진)에서 라이언 고슬링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을 봤을 때처럼.

티셔츠는 해치지 않아요

영화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

영화는 한 남자의 문신투성이 상반신을 화면 가득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카메라가 뒤를 쫓는 동안 그는 티셔츠에 몸을 끼워 넣는다. 메탈리카의 로고와 전기의자에 묶인 사형수의 그림이 등판에 자리잡고 있다. 1984년에 발표된 밴드의 두번째 정규 앨범인 <라이드 더 라이트닝>(Ride the Lightning)의 아트워크다. 모터사이클 스턴트맨을 연기한 라이언 고슬링은 거의 출연 분량 내내 이 티셔츠 차림을 고수한다. 단단한 팔 근육을 자랑하고 싶었는지 소매는 아예 잘라냈다. 마초 냄새가 풍기다 못해 아예 코를 찌르는 듯하다. 캐릭터에게도 배우에게도 썩 잘 어울리는 의상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 게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몇 시간 뒤, 나는 똑같은 제품을 인터넷 장바구니에 넣고 있었다.

1980년대는 모든 게 조금씩 넘치던 시절이다. 메탈 밴드들의 앨범 아트워크도 특히 과격하지 않았나 싶다. 요란한 프린트가 딱히 취향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나는 이 무렵의 록밴드 티셔츠를 발견할 때마다 지름신의 봉인이 풀리는 걸 경험한다. 한때 헤드뱅잉깨나 해봤던 메탈 팬이라서? 그보다는 닥치고 최고 강도로만 밀어붙이는 비주얼 자체의 즐거움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무섭고 사악한 형들이라며 겁을 주는데, 그게 무해하면서도 상상력이 풍부한 허세처럼 보인다.

티셔츠는 해치지 않아요

영화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

그런데 만약 라이언 고슬링이 아이언 메이든이나 주다스 프리스트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면 나도 결제 버튼까지는 누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완성도 높은 콘셉트를 선보인 팀들이긴 하나 살가죽이 홀랑 벗겨진 시체인지 사신인지를 가슴에 얹고 다니기에는 내 취향이 다소 보수적이다. 음악 색깔부터가 다르기 때문일 텐데, 메탈리카는 이들에 비해 한결 표현이 무난한 편이다. 전기충격으로 사람이 타들어가는 광경을 과연 '무난하다'고 말해도 되는 건지 헷갈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메탈리카의 기타리스트인 커크 해밋은 <라이드 더 라이트닝>이라는 앨범 제목을 스티븐 킹의 장편소설인 <스탠드>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고 밝혔다. 작가는 전기의자를 이용한 사형을 '번개에 올라타는 것'에 비유했다.

최근 메탈리카의 아트워크는 새삼스러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012년, 콜로라도의 한 극장에서 총기를 난사해 12명을 살해한 제임스 홈스의 재판에 배심원 한 명이 <라이드 더 라이트닝>의 프린트 티셔츠를 입고 참석한 것이다. 한 온라인 매체가 사형을 암시하는 비주얼이 판정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며 문제 제기를 했지만 판사는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고작 티셔츠일 뿐이며 해당 배심원이 대단한 의도를 품고 그 옷을 고른 건 아니라고 그는 잘라 말했다. 맞다. 고작 옷 쪼가리다. 그리고 금기와 일탈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손쉽고 안전하게 해소해주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특히 비뚤어지고 싶은 월요일 출근길에 메탈리카의 티셔츠를 꺼내 입곤 한다. 야비한 악플을 다는 것보다 훨씬 건전한 분노 표출법이다. 티셔츠는 아무도 해치지 않으니까.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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