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기가 글로벌 AI 산업을 주도하는 엔비디아를 등에 업고 사업 규모를 대폭 키울 기회를 맞았다. 삼성전기는 반도체 기판 사업이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 확대와 맞물리면서 매출 20조 원 시대를 예상보다 빠르게 열 수 있다는 기대를 받고 있다.
장덕현 삼성전기 대표이사 사장이 집중적으로 투자해 온 플립칩 볼그리드어레이(FC-BGA)가 실적 도약의 핵심 축으로 떠오른 점도 주목할 만한 요소다. 엔비디아가 삼성전기를 첨단 패키지 기판 공급망의 주요 협력사로 공식화하면서 그동안 쌓아 온 생산 역량과 기술 경쟁력이 본격적으로 실적에 반영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장 사장은 삼성전기의 실적 성장 속도를 더욱 높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반도체 기판 사업이 실적의 무게중심을 바꾸면서 삼성전기의 그룹 내 존재감도 한층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장덕현 삼성전기 대표이사 사장이 글로벌 빅테크 엔비디아를 타고 '매출 20조 원' 달성 시기를 앞당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삼성전기
23일 증권업계 분석을 종합하면 내년까지 삼성전기 실적 증가 기울기가 더욱 가팔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시선을 모은다.
일반적으로 기업의 매출과 영업이익 규모가 커질수록 증가율이 둔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실적의 절대 규모가 커진 만큼 전년보다 증가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더 큰 폭의 실적 개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성전기는 이런 통상적 흐름과 달리 실적 규모가 커지는 가운데서도 성장 속도까지 높일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삼성전기의 가파른 실적 성장의 배경에는 엔비디아가 자리하고 있다. 앞서 삼성전기가 반도체 기판 부문에서 엔비디아와 대규모 협력에 나선다고 발표한 뒤 삼성전기의 실적 전망치가 대폭 상향됐다.
이날 하나증권은 삼성전기의 2027년 연결기준 매출과 영업이익 전망치를 각각 20조3933억 원, 5조7805억 원으로 제시했다. 기존 전망치인 매출 18조2001억 원, 영업이익 4조7538억 원에서 각각 12%, 22% 상향 조정한 것이다.
전년과 비교한 삼성전기 매출 증가율을 보면 2025년은 10%, 올해는 28%로 전망된다. 이어 상향 조정된 매출 전망치에 따르면 삼성전기의 2027년 매출 증가율은 올해를 훌쩍 뛰어넘는 41%다.
삼성전기 영업이익 증가율도 2025년 24%에 이어 올해는 135%, 내년에는 163%로 예측됐다.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 증가 속도가 더 빨라지는 것이다.
삼성전기는 21일 엔비디아와 공동 투자를 통해 세종과 부산 사업장에 FC-BGA를 중심으로 AI 반도체 패키지기판 생산을 위한 신규 공장을 증설한다고 발표했다. 올해 말부터 수년 동안 엔비디아에 AI 반도체용 패키지 기판을 장기 공급하기로 했다.
FC-BGA는 반도체 칩과 메인 기판을 연결해 전기적 신호와 전력을 전달하는 고성능 기판으로 중앙처리장치(CPU), 그래픽처리장치(GPU)에 쓰인다.
특히 엔비디아가 삼성전기를 FC-BGA 협력사로 공식화하면서 장덕현 사장이 공을 들여온 이 사업이 삼성전기의 실적 도약을 이끌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리고 있다.
엔비디아는 20일(현지시각)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연례 개발자회의 ‘GTC 베를린’에서 AI 가치사슬(밸류체인) 전반의 부품들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공급망 협력사들과 함께 글로벌 제조 역량을 확대한다는 청사진을 내놨다.
엔비디아는 2028년 말까지 첨단 패키징 조달 규모를 현재보다 300% 이상 확대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이 부분에서 공식적으로 삼성전기가 일본 이비덴, 대만 유니마이크론 등과 함께 공급사로 언급됐다. 그동안 삼성전기는 엔비디아에 FC-BGA를 공급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이번 GTC 베를린에서 “우리 공급망 협력사들은 세계 최고의 제조업체들”이라며 “이들이 생산능력을 확장하고 새로운 산업 혁명을 이끌어갈 AI 슈퍼컴퓨팅 시스템을 제공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어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FC-BGA는 장 사장이 삼성전기에서 가장 공격적으로 확장해 온 사업 가운데 하나다.
삼성전기는 장 사장이 2021년 12월 대표이사로 내정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베트남 FC-BGA 생산설비에 1조1천억 원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장 사장은 올해 9월 세종에 4조2700억 원, 베트남에 2조5100억 원 등 모두 6조7천억 원 이상을 쏟아붓는 FC-BGA 생산능력 확대 결정까지 내리며 사업 확장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FC-BGA 사업이 엔비디아의 수요와 맞물리면서 장 사장의 삼성전기가 그룹에서 차지하는 존재감이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삼성그룹에서 연간 매출이 20조 원을 기록했던 제조 부문 계열사는 삼성전자 이외에 삼성디스플레이, 삼성SDI 등 각 분야에서 글로벌 ‘톱티어’ 경쟁력을 지닌 곳이다.
삼성전기가 장 사장 체제를 갖춘 뒤 5년 만에 글로벌 전자부품업계에서 경쟁력을 인정받고 매출을 2배 이상 확대하며 매출 20조 원 시대를 열게 되는 것이다. 2021년 삼성전기 연결기준 매출은 9조6천억 원이다.
삼성전기의 가파른 외형 성장은 우수한 수익성을 동반한다는 차원에서도 의미가 적지 않다. 삼성전기의 내년 예상 영업이익률은 28%를 웃돈다. 현재 그룹에서 삼성전자를 제외하면 제조 부문에서 15% 이상의 영업이익률을 내고 있는 계열사는 찾기 힘든 상황이다.
김민경 하나증권 연구원은 23일 삼성전기 분석보고서에서 “이번 보고서를 통해 실적 예상치를 상향 조정했는데 이는 대부분 FC-BGA 실적 변화에서 나온 것”이라며 “삼성전기는 2027년 상반기에는 생산효율화, 하반기는 국내 세종사업장의 신규 생산라인 가동을 통해 생산능력이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장 사장은 엔비디아와 협력을 놓고 “지금까지 축적해 온 첨단 FC-BGA 제조 경쟁력과 고신뢰성 적층세라믹캐패시터(MLCC) 기술을 결합해 엔비디아의 AI 플랫폼이 최고의 성능과 품질로 시장에 제때 공급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