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경찰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17세 소녀가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 같은 나이의 소년이 한쪽 손을 잃는 등 심각한 부상자가 잇따르면서 진압 무기의 위험성을 둘러싼 우려가 커지고 있다.
최루가스와 섬광·폭음탄, 폼탄 발사기에 이어 일부 도시에서는 장갑차까지 등장하면서 프랑스 경찰의 강경 진압 방식도 도마 위에 올랐다.
10월17일(현지시각)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서 생활비 상승과 유가 급등에 항의하는 시위 도중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한 가운데, 프랑스 경찰이 최루탄을 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AP는 23일(현지시각) 프랑스 경찰이 시위 현장의 치안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과 함께, 청소년들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힌 진압 방식에 대한 거센 비판에 직면해 있다고 보도했다.
앞서 17일 프랑스 동부 뮐루즈에서는 17세 소녀가 경찰의 최루탄 발사체에 얼굴을 맞아 왼쪽 눈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시력을 영구적으로 잃었다. 같은 날 생테티엔에서는 17세 소년이 경찰이 발사한 수류탄에 오른손을 잃었다.
최루가스에 섬광탄, 폼탄까지, '비살상 무기'가 남긴 상처
10월17일(현지시각) 프랑스 서부 낭트에서 생활비 상승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린 가운데, 프랑스 경찰관들이 한 남성을 진압봉으로 구타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프랑스 경찰이 시위 진압에 사용하는 장비는 진압봉과 최루가스뿐만이 아니다. 강력한 폭발음을 내는 섬광·폭음탄, 뭉친 스펀지를 사람에게 쏘는 폼탄, 눈을 부시게 만드는 섬광 진압 방패까지 동원된다.
이 장비들은 흔히 '비살상 무기'라고 불리지만, 정확하게는 일반 총기보다 치명성을 낮추도록 설계된 '저살상 무기(less-lethal weapons)'에 가깝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용 방식과 노출 정도에 따라 영구적인 장애 남기거나 사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루가스에 노출되면 눈과 피부에 심한 통증이 발생하고 기침, 가슴 답답함, 호흡곤란 등이 나타날 수 있다. 특히 천식 등 호흡기 질환이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위험하다. 시야가 흐려지고 숨 쉬기 어려워진 시위 참가자들이 한꺼번에 대피하는 과정에서 넘어지거나 서로 밀치는 등 2차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섬광·폭음탄은 강한 폭발음과 섬광으로 사람들을 순간적으로 놀라게 하고 방향 감각을 잃게 만드는 장비다. 귀 가까이에서 폭발하면 고막이 손상되거나 영구적인 청력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폭발 충격과 파편으로 손가락이나 손 등 신체 일부가 절단되는 중상도 가능하다.
국제앰네스티는 지난 7일 프랑스 당국에 모든 섬광·폭음탄을 시위 진압에서 영구적으로 퇴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공포에 빠뜨리기 위해 설계된 장비가 돌이킬 수 없는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프랑스 내무부는 이달 7일 고등학생 시위 진압에서 섬광·폭음탄 사용을 일시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다만 모든 집회에서 해당 무기의 사용을 전면 금지한 것은 아니다.
10월17일(현지시각) 프랑스 남서부 보르도에서 생활비 상승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린 가운데, 프랑스 국가헌병대원이 '쿠거(Cougar)' 유탄발사기를 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프랑스 경찰은 시위 진압에 최루탄과 섬광·폭음탄 등을 발사할 수 있는 '쿠거(Cougar)' 유탄발사기도 사용한다. 56㎜ 구경의 이 장비는 멀리 떨어진 시위대를 향해 섬광탄 등을 발사하는 데 쓰인다. 특히 유탄을 사람에게 직접 발사할 경우 강한 충격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힐 수 있어 프랑스에서는 수평 직접 사격을 금지하고 있다.
폼탄 발사기는 '부드러운 탄환'이라는 이름과 달리 강력한 충격을 가한다. 이 장비는 금속 실탄 대신 변형 가능한 소재의 탄환을 발사해 상대방을 제압한다. 고속으로 날아온 탄환이 눈에 맞으면 안구가 파열되거나 영구적으로 시력을 잃을 수 있다. 가슴이나 복부에 맞을 경우에도 강한 충격으로 갈비뼈 골절이나 내부 장기 손상이 발생할 수 있다.
프랑스 경찰이 최근 시험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섬광 진압 방패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이 장비에는 빠르게 깜빡이는 고강도 조명이 장착돼 있다. 강한 빛으로 시위대의 눈을 부시게 만들어 경찰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 장비는 순간적으로 눈을 부시게 하고 시야를 방해해 방향 감각이나 균형을 잃게 할 수 있다. 사람이 밀집한 시위 현장에서는 이러한 효과가 넘어짐이나 충돌 사고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섬광 진압 방패를 둘러싼 논란은 신체적 위험뿐만이 아니다. 시위대와 일부 정치인들은 강한 섬광이 시민과 언론인의 촬영을 방해해 경찰의 무력 사용을 기록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비판한다.
장갑차까지 등장한 프랑스 거리
10월17일(현지시각)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서 생활비 상승과 유가 급등에 항의하는 시위 도중 시위대와 진압 경찰이 충돌한 가운데, 프랑스 국가헌병대의 다목적 진압 장갑차인 상토르(Centaure)가 거리에 배치돼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시위 진압 현장에는 장갑차까지 등장했다. 지난 17일 마르세유와 보르도에서 국가헌병대의 상토르 장갑차가 배치됐다.
르몽드의 20일 보도에 따르면 보르도에서는 경찰이 상토르 장갑차를 이용해 시위대가 설치한 바리케이드를 밀어냈다. 물대포도 동원됐다. 장갑차가 등장할 만큼 현장 상황은 격렬했다.
경찰 측 피해도 상당하다. AP통신이 23일 인용한 프랑스 내무부 집계에 따르면 지난 17일 전국에서 경찰관과 국가헌병대원 997명이 부상했으며, 이 가운데 7명은 중상을 입었다.
같은 날 파리에서는 시위 참가자와 주민 100명 이상이 다쳤다. 이날 프랑스 전역에서 체포된 사람은 약 2400명에 달했다.
"경찰력 20% 더 늘린다", 24일 시위 앞두고 프랑스 전역 긴장
10월17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에서 생활비 상승과 공공서비스 예산 삭감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모여든 가운데, 프랑스 경찰이 레퓌블리크 광장 주변을 통제하며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학생단체와 노동조합, '노란 조끼' 운동 참가자들이 24일 토요일 추가 집회를 예고하면서 프랑스 당국은 지난 주말의 폭력 사태가 재연될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24일 경찰과 국가헌병대 등 치안 인력을 지난 17일보다 20% 늘린다는 계획을 내놨다. 경찰관들의 휴가를 취소하고 복귀를 지시했으며, 경찰 특수부대 RAID와 국가헌병대 특수부대 GIGN, 대테러 경계작전인 상티넬(Sentinelle)에 투입되는 군 병력도 동원할 방침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폭력 사태를 막기 위해 일부 집회를 제한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에 따라 리옹과 마르세유 등에서는 24일 시위가 금지됐으며, 파리에서도 일부 시위 경로가 금지됐다.
다만 파리에서는 노동총동맹(CGT) 등이 주도하는 바스티유 광장부터 나시옹 광장까지의 행진이 허용됐다.
10월22일(현지시각) 프랑스 남서부 보르도 도심에서 한 보행자가 상점 유리창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나무판자 앞을 지나가고 있다. 상점들은 오는 24일 예정된 시위를 앞두고 약탈과 기물 파손 등에 대비해 유리창에 나무판자를 덧댔다. ⓒAFP/연합뉴스
시위 재확산에 대한 우려는 미술관과 명품 매장이 밀집한 파리의 거리로까지 번지고 있다.
파리의 주요 현대미술 행사인 '아트 바젤 파리'는 당초 25일까지 열릴 예정이었지만, 안전 문제를 이유로 23일 오후 7시 행사를 조기 종료하기로 했다. 프랑스 문화부는 22일 루브르박물관과 오르세미술관, 피카소미술관 등 주요 문화시설이 24일 문을 닫는다고 발표했다.
지난 17일 시위 당시 일부 명품 매장이 약탈당하거나 파손되는 피해를 입자, 주요 브랜드들이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매장 앞에 철제 셔터와 보호 철망을 설치하고 있다.
10월22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도심의 한 총포상 계산대에 프랑스 D등급 호신용 무기인 JPX4 LE(오른쪽)와 가디언 엔젤 III(왼쪽) 최루액 발사기, 다양한 최루가스 스프레이가 진열돼 있다. ⓒAFP/연합뉴스
특히 지난 주말 시위 과정에서 약탈 사태가 발생한 이후 파리의 호신용 무기 판매가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AFP통신은 22일 파리 도심의 한 총포상 판매원을 인용해 약탈 사태 이후 매출이 10배로 늘었다고 보도했다. 이 판매원은 오는 24일 추가 시위를 앞두고 상인들이 폭력과 약탈 사태의 재발을 우려해 호신용 무기를 구매하고 있다며 "극심한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무장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