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 시절 간첩 사건 수사와 계엄 업무 등을 공적으로 인정받아 훈장과 표창을 받은 이들이 있다. 이후 재심과 진상조사에서 불법 구금과 고문을 동원한 간첩 조작이 확인됐고, 계엄 업무도 국헌 문란과 내란 행위라는 사법적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수여된 포상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취소되지 않았다.
정부가 이들에게 수여된 포상 198건을 거둬들였다. 역사 바로잡기에 늦은 때란 없다는 인식 아래, '국가를 위한 공적'의 제 의미를 되찾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박종철 열사가 고문 당한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연합뉴스
22일 행정안전부와 경찰청 등에 따르면 정부는 전날 열린 제31회 국무회의에서 167명에게 수여된 정부포상 198건의 취소안을 심의·의결했다. 취소 대상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관여한 강민창 전 내무부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전 치안본부 대공수사처장, 군사정권 시절 '고문 기술자'로 불린 이근안 전 경감 등이 포함됐다. 이번 취소는 국방부 소관 76건과 국정원 소관 122건을 대상으로 한다. 이와 별도로 경찰이 받은 약 10만 건의 정부포상을 전수조사해 민주화운동 탄압과 인권침해, 진실화해위원회 관련 사건 등에 수여된 포상 173건에 대해 재검토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국방부가 취소한 76건 가운데 42건은 '국가안전보장 유공'을 이유로 수여된 포상이다. 국방부가 당사자들의 근무 경력과 당시 대간첩 작전 기록 등을 조사한 결과 무공훈장 수여 요건인 '전투에 준하는 직무 수행'이나 무공포장 수여 요건인 '국토방위에 대한 헌신·노력'에 해당하는 공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나머지 34건은 '계엄 업무 유공'을 이유로 수여됐다. 국방부는 당시 비상계엄이 헌정질서를 파괴한 국헌문란과 내란행위로 사법적 평가를 받은 데다, 계엄사령부와 예하 부대에서 수행한 업무 역시 신군부의 불법적 권력 장악에 조력한 행위인 만큼 상훈법상 '거짓 공적'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경찰청은 남민전 사건과 삼척 고정간첩단 사건, 서울대 무림사건, 함주명 간첩사건 등 5개 사건과 관련해 20명이 받은 포상 36건을 취소했다.
국정원은 재일동포 간첩사건과 보성 가족 간첩단 사건, 제주 모녀 간첩사건 등 19개 사건에서 수사 절차 위반과 인권침해 사실을 확인했다. 이들 사건과 관련해 71명에게 수여된 포상 86건이 취소됐다. 경찰청과 국정원은 과거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피해를 본 당사자와 유가족에게 사과했다.
취소 과정에서는 당사자와 유족의 반론도 접수됐다. 국방부는 사전에 의견 제출 기회를 부여하고 연락이 닿지 않는 경우에는 관보에 관련 내용을 게재했다. 제출된 의견 대부분은 "군인으로서 계엄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취지였다고 국방부는 설명했다.
정부는 올해 1월에도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과 인천 미법도 간첩사건, 구로농지 소송사기사건 등과 관련해 수여된 보국훈장 등 11건을 취소했다. 3월에는 12·12 군사반란 가담자 10명에게 수여된 무공훈장을 박탈했다.
3월25일 이근안 전 경감이 사망하면서 국가폭력 가해자에게 남아 있는 포상 문제도 다시 불거졌다. 이와 관련해 이 대통령은 자신의 엑스(X, 옛 트위터)를 통해 "고문과 사건 조작, 사법살인 같은 최악의 국가폭력 범죄자들에게 준 훈·포장 박탈은 만시지탄이지만 당연한 조치"라고 밝힌 바 있다.
1979년 12월14일 서울 보안사령부에서 기념촬영한 12.12 군사 쿠테나 주역들 모습. ⓒ연합뉴스
과거 정부에서도 반헌법적 행위와 관련된 서훈을 취소한 사례가 있다. 노무현 정부는 2006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과 12·12 군사반란 및 5·18 진압 관련자 등을 포함한 176명의 서훈을 한꺼번에 취소했다.
그에 앞서 2005년 상훈법이 개정되면서 관계 부처의 요청이 없더라도 행정자치부 장관이 취소 사유를 확인해 직접 국무회의에 안건을 제출할 수 있게 됐다. 이를 근거로 정부 수립 이후 최대 규모의 서훈 취소가 이뤄졌지만, 이후에도 간첩 조작과 민주화운동 탄압 등에 관여한 이들의 포상은 상당수 남아 있었다.
정부포상 취소가 곧 대규모 금전 환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훈장과 증서는 환수 대상이지만 당시 지급된 포상금을 돌려받을 법적 근거는 없다. 훈장에 따라 연금이 지급된 경우에도 환수할 수 있는 금액은 최대 5년 치다. 수훈자가 이미 사망했거나 훈장을 분실했다면 실물 회수도 쉽지 않다.
따라서 이번 조치는 물질적 환수보다 국가의 공식 기록을 수정하는 성격이 크다. 포상 취소가 확정되면 국가가 해당 행위를 공적으로 인정해 부여했던 명예도 공식적으로 철회된다.
국가폭력 가해자에게 부여된 명예를 뒤늦게 취소한 사례는 해외에서도 찾을 수 있다. 스페인은 2022년 민주기억법을 제정해 프랑코 독재 시기 억압 기구에 몸담았거나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 이들의 훈장과 보상을 사후에도 재검토할 수 있도록 했다. 2023년에는 프랑코 정권이 1975년 칠레 군사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에게 수여한 군사훈장을 48년 만에 취소했다.
군부독재 시절 납치 등의 혐의로 기소된 호르헤 비델라(왼쪽)와 레이날도 비뇨네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2012년 7월6일(현지시각)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법정에서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아르헨티나는 2004년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의 지시로 군사독재자 호르헤 비델라와 레이날도 비뇨네의 초상화를 육군사관학교 명예의 전당에서 철거했다. 같은 해 고문이 자행됐던 해군기계학교를 '기억과 인권의 공간'으로 전환하기로 했고, 2015년 5월에는 이곳에 상설 전시를 갖춘 기억현장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최근 스타벅스와 배재고에서 잇따라 발생한 논란은 국가폭력의 역사가 현재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일단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포상 취소가 이 같은 역사 조롱을 직접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번 포상 취소는 국가폭력에 대한 엄단 의지를 재확인한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