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에서 벌어지는 '잠실 개표소 봉쇄 시위'는 한국 사회가 마주한 혼란과 불신을 압축적으로 펼쳐보이고 있다.
개표소 출입구를 둘러싼 시민들의 바리케이드 뒤에는 주권을 지키겠다는 절박함과 선거 제도에 대한 불신, 장기화된 시위로 일상을 침해받는 시민들의 불편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며 재선거를 요구하는 '잠실 개표소 봉쇄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8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출입구 앞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이 시위를 단순히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라고 규정하기도, 반대로 '시민 저항 운동'이라고만 평가하기도 쉽지 않다. 같은 현장을 바라보면서도 사람들은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지금 잠실을 둘러싼 시선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시민들의 감시와 자발적 참여 움직임으로 보는 시선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며 재선거를 요구하는 '잠실 개표소 봉쇄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9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에서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첫 번째 시선은 이번 시위를 좌우라는 이념의 틀을 넘어선 시민들의 자발적 움직임으로 바라본다. 소셜미디어 상에는 잠실 개표소 봉쇄 시위를 두고 '잠실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 시위대의 일부는 선거 과정의 투명성과 공정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들에게 잠실은 시위 현장만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감시의 공간이다.
'큰별쌤' 최태성 한국사 강사는 9일 인스타그램에 4.19 혁명 사진과 잠실 개표소 봉쇄 시위의 사진을 함께 올리며 "1960년 일어난 4.19혁명의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있다"며 "2026년 대한민국에서 백주대낮에 참정권이 침해됐다"고 썼다.
최 강사는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두고 "진상규명, 책임규명, 대안제시가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져야 한다"며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며 재선거를 요구하는 '잠실 개표소 봉쇄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9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매표소에 손팻말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현장에서는 기존의 부정선거 음모론을 주장하는 극우세력 뿐만 아니라 '공정'을 민감하게 느끼는 2030대 청년층의 참여가 적지 않게 나타났다. 이들은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초래한 선거관리위원회를 규탄하며 철저한 진상규명과 '재선거'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시민들은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집회와 시위를 통해 일어서 왔다. 이들은 기존 극우 집회에 거리를 두기 위해 성조기가 아닌 태극기만 흔들어 달라고 요구하거나 평화적 시위를 지향하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특히 이 집회가 '미신고 집회'라는 점은 역설적으로 자발성을 보여주는 근거로 거론된다. 정당이나 시민단체가 조직한 집회라기보다 SNS를 통해 모여든 시민들의 다중 운집에 가깝다는 것이다. 현장에는 생수와 간식, 휴대전화 충전기 등을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시민들도 나타났다.
'선관위 불신'이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한다는 시선
전날 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투표용지 부족으로 투표 시간이 오후 10시까지 연장됐던 서울 송파구 잠실7동 제2투표소 앞에서 4일 시민들이 투표함 반출에 반대하고 있다. ⓒ연합뉴스
두 번째 시선으로 시위에서 요구하는 내용과 별개로 시위가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는 쪽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투표 과정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문제를 비판하고 책임을 묻는 것은 유권자의 권리이지만, 법이 정한 개표 절차를 물리적으로 저지하고 투표함 반출을 봉쇄하는 행위는 결국 선거 제도의 전반의 공격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민주주의 절차에 대한 불신이 민주주의 절차 자체를 마비시키는 방향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선거 관리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인 투표용지 수급에 차질이 발생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만큼, 이번 사태가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는 세력에게 빌미를 제공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황교안 전 총리가 이끄는 자유혁신당 등 기존에 부정선거론을 지속적으로 주장해온 정치권 인사들이 시위에 결합하면서 이러한 우려는 더욱 커지고 있다.
10일 저녁, 잠실 개표소가 설치됐던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에서 열린 '6·3 부정선거 대국민 보고대회'에서 미국의 대표적인 부정선거 음모론자로 알려진 모스 탄 리버티대 교수도 참석해 발언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 현장에 모였던 일반 시민들의 비중은 줄고, 기존 극우 진영 인사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출발했지만, 점차 검증되지 않은 의혹과 음모론이 집회의 전면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우려다.
기본권 요구가 '타인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시선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빚어진 '잠실 개표소 봉쇄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11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에서 체육단체들이 연 업무 정상화 호소문 발표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세 번째 시선은 시위 현장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에 주목한다. 선거 공정성을 둘러싼 논쟁과는 별개로, 시위가 과격해지고 장기화하면서 다른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잠실 개표소 봉쇄가 이어지면서 핸드볼경기장에 사무실이 있는 대한체육회 직원과 선수들은 건물에 출입하지 못하고, 시위대로부터 소지품 검사와 신분 확인을 받았다. 타인의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다.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체육단체들은 11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시위는 존중한다"면서도 "우리들의 일터로 돌아가고 싶다"고 호소했다.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는 '개표소 봉쇄 시위'가 이어진 1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에서 시위대가 경기장에 입주한 체육단체 직원들의 출입 허용 여부와 관련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앞서 시위 현장에서는 마스크를 쓰고 근무 중인 경찰관에게 신분을 확인하라고 요구하거나, '중국 경찰'이나 '가짜 경찰' 등 근거가 확인되지 않은 주장들이 온라인과 현장에서 확산되기도 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10일 소셜미디어 엑스(X, 옛 트위터)에 "현장 경찰관도 '제복 입은 시민'"이라며 "잠실 시위 현장에 배치된 경찰관을 향한 일부 시위대의 모욕과 조롱이 도를 넘어섰다"고 비판했다.
이 대통령은 이어 "시민의 안전과 인권을 보호하고 있는 경찰에 대한 폭력 행위는 시민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민주주의 공론장을 훼손하는 결과를 낳게 될 뿐"이라며 "시민들의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토론은 마땅히 보장되어야 하지만, 선을 넘는 행위까지 용인할 수는 없다. 현장 경찰관과 주변 시민들에 대한 비상식적인 폭력행위가 더이상 벌어지지 않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잠실 개표소 봉쇄 시위가 드러내는 한국 사회의 분열
6·3 지방선거 투표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며 재선거를 요구하는 '잠실 개표소 봉쇄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7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에서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잠실 개표소 봉쇄 시위는 '부정선거 음모론'이나 '주권 수호 운동'이 혼재돼 있다. 선관위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촉발한 시민들의 분노, 선거 시스템에 대한 불신, 극우 세력 개입, 시위 장기화 과정에서 드러난 각종 부작용이 한 공간에 뒤섞여 있다.
그래서 같은 현장을 보고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누군가에게 잠실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시민 행동의 현장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위험한 현장이다. 누군가에게는 정치적 주장보다 시민의 안전과 일상이 먼저 걱정되는 공간이다.
개표소를 둘러싼 대치와 구호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자산인 시민들의 신뢰가 얼마나 깊이 흔들리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선거관리위원회가 그 신뢰를 다시 세우지 못한다면, 잠실의 풍경은 이번 선거에만 머무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