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방송가에서 AI로 100% 제작한 영상물이 등장하며 미디어 산업 지형이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 일부 제작사의 실험적 시도에 그쳤던 AI 영상이 공영방송 정규 편성 자리까지 꿰찼다.
인공지능 영상물은 고전 해설이나 '지식 클립'뿐 아니라 리얼리티 쇼까지 적용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조만간 '인공지능 드라마'도 나올 기세이다.
김유열 EBS 사장이 25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2026년 EBS 개편 설명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9일 방송가 움직임을 살펴보면 EBS는 30일부터 완전히 AI 기술로 제작된 'AI 고전, 역사를 바꾼 100책'과 'AI 인물 한국사' 등의 프로그램을 방송한다. 이들 영상물은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돼 매주 월~금요일 새벽 0시5분부터 15분 동안 방영된다.
'AI 고전, 역사를 바꾼 100책'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등 고전 작품을 설명하는 콘텐츠로, AI로 재현된 역사 속 저자가 등장해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EBS가 이와 같은 'AI 혁신'을 결단한 배경에는 '비용'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놓여있다.
김유열 EBS 사장은 25일 '2026 EBS 개편 설명회'에서 "EBS는 공영방송임에도 불충분한 공적 재원 여건으로 인해 장기 대형 프로젝트 추진에 제약이 있었다"며 "AI 기술의 발전은 기존 한계를 돌파하는 결정적 기회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광호 EBS 편성센터장은 과거 막대한 제작비 때문에 중단했던 인형극을 언급하며 "(인형극) 한 편을 만드는 데 제작비가 1200~1500만 원 정도 든다"며 "AI를 쓰면 외주제작을 해도 제작비 700만 원 이하로 책정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로써 낮은 수익성 탓에 외면받았던 공영방송 특유의 장기 프로그램들도 다시 제작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 중국 관영방송, AI로 '천년의 시가'를 브라운관에 옮겨놓다
이는 우리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돈 걱정이 전혀 없으 보이는 중국 관영 중국중앙TV(CCTV)노 AI 애니메이션 '천추시송'을 내놨다.
중국 애니메이션 '천추시송' ⓒ중국 CCTV
천추시송은 '천년 동안 전해지는 시를 노래한다'는 의미로, CCTV가 AI를 활용해 중국의 고전 시를 소재로 만든 교육용 애니메이션이다. 당·송대의 고전 시인들의 작품이 중심이 됐으며, 7분 길이 영상 총 26개로 구성됐다. 2024년 2월 시청자들에게 첫선을 보였다.
이 콘텐츠는 등장인물, 배경 등 모두 AI로 제작된 탓에 특유의 인위적인 느낌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전통 작품과 신기술을 결합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제작 기간과 비용도 대폭 절감했다. 기존 방식대로 '천추시송'을 제작할 경우 8개월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됐으나, AI 기술 덕에 4개월로 단축할 수 있었다. 중국 매체 동방재부망에 따르면 베이징 사회과학원 왕펑 부연구원은 "AI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면 기간을 대폭 단축하고 비용을 현저히 낮출 수 있다"라고 말했다.
'천추시송' 감독은 "AI덕에 기존에 한 달에 1편밖에 제작하지 못했던 것을 지금은 한 달에 3편을 만들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 세계 최초 AI 리얼리티쇼, 현실 프로그램과 비교해 비용 90% 절감
민간 제작사는 AI 기술을 활용한 더욱 과감하고 파격적인 실험을 선보이고 있다.
영국 제작사 에이아이메이션 스튜디오(AiMation Studios)는 지난해 12월 '논플레이어 컴뱃'(Non-Player Combat)을 공개했다. '논플레이어 컴뱃'은 세계 최초 100% AI로 생성된 리얼리티쇼로, 자신이 가상 인물인지 모르는 6명의 AI 캐릭터가 무인도에서 생존 게임을 벌이는 내용이다.
영국 제작사 에이아이메이션 스튜디오(AiMation Studios)가 100% AI로 제작한 '논플레이어 컴뱃'(Non-Player Combat)의 한 장면 ⓒAiMation Studios 유튜브
영상에는 참가자가 수십 마리의 늑대에게 쫓겨 나무 위로 도망가는 모습과 잠을 청할 곳을 찾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사망하는 참가자의 모습 등이 등장한다. 비록 AI 제작물임이 한눈에 드러나는 완성도지만, 콘텐츠의 흥미로운 스토리와 생생한 영상미는 시청자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시청자들은 이 새로운 콘텐츠를 두고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였다. "훌륭한 쇼다",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AI 콘텐츠가 향후 얼마나 발전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는 등 긍정적인 평가가 나왔다. 반면 "최악이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영상 속 언어가 계속 바뀐다"는 등의 부정적인 반응도 없지 않았다.
눈에 띄는 점은 제작비를 획기적인 수준으로 절감했다는 점이다. 논플레이어 컴뱃의 제작비는 약 2만8천달러(약 4200만 원)로, 현실 리얼리티쇼의 1/10 수준에 불과하다. 실제 리얼리티쇼 '트레이터(The Traitors)'가 한 회당 15억 원 이상의 비용을 투입하는 것과는 크게 대비된다.
제작자는 차후 AI 영상물의 지평이 더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톰 패턴 에이아이메이션 스튜디오의 CEO겸 감독은 "레거시 미디어에서 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이 흥미로운 상황"이라며 "미디어는 세월이 흐르면서 끊임없이 분화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할리우드가 시대적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추락하고 있는 때"라며 "사람들이 즐거움을 느낀다면 AI 영상물이라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