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는 1982년 출범했다. OB 베어스, MBC 청룡, 해태 타이거즈, 롯데 자이언츠, 삼성 라이온즈, 그리고 삼미 슈퍼스타즈 등 6개 구단이 한국 프로야구의 원년 구단이다. 주로 실업야구에서 뛰었던 선수들이 프로선수가 됐지만, 이들의 기량은 프로와 거리가 멀었다. 이때 한국 프로야구의 수준 상승에 기여한 건 일본에서 활약하던 재일 교포 선수들이었다. 투수 장명부도 그중 한 명이다.
일본에서 장명부(일본 이름 후쿠시 히로아키) 투수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제작됐다. 제목은 ‘현해탄의 낙엽’이다. 영화를 연출한 건, 일본 무사시노미술대학의 한국인 유학생 이영곤(26)씨다.
장명부는 만년 꼴찌팀이었던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1983년 한 해 동안 30승(28 선발승)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의 선수 생활은 4년 밖에 되지 않았다. 은퇴 후에는 필로폰 투약 혐의로 대한민국 입국 금지 조치까지 당했다. ‘현해탄의 낙엽’을 연출한 이영곤 감독은 이 다큐멘터리가 ”장명부 선수의 생애만을 다룬 작품이 아니라고”고 말한다. 그는 ”그 배경에 있는 한일관계의 문제도, 그 속에서 괴로워하는 재일동포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재일교포 출신 한국 프로야구 선수로는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삼성 라이언즈로 건너가, 3년간 54승을 거둔 후 다시 일본 프로야구에 복귀한 김일융(일본명 니우라 히사오)이 있다. 한일 양국의 프로리그에서 감독을 맡은 백인천도 유명하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도 이미 40대 후반 이상이다. 그런데 20대인 이영곤 감독은 왜 장명부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먼저 이 영화와 당시 보도 등을 참조해 장명부의 생애를 살펴보도록 하자.
던지고 또 던져서 만든 30승의 기록
장명부는 일본에서 재일교포 2세로 태어나 돗토리니시 고등학교에서 ”마츠바라 아키오”라는 이름으로 1968년 가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그 후 일본 여성과 결혼해 ”후쿠시 아키오”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귀화했다. 1982년까지 난카이 호크스, 히로시마 카프 등 3개 구단에서 91승 84패 9세이브를 기록했다가 82년 가을에 창립 2년째인 한국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했다.
당시 32세. 1억원이 넘는 고액 연봉 등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당시 롯데 자이언츠 등에서 감독을 맡은 박영길씨는 “프로야구 초창기 시절 한국과 일본의 수준 차이는 바둑으로 치면 9단과 초단 정도”라고 회고했다. 장명부는 그런 시절의 이른바 “외국인 용병”이었다.
장명부는 83년에 30승 16패 6세이브를 올리며, 전년도에 15승 65패, 승률 .188로 압도적인 꼴찌였던 삼미슈퍼스타즈를 우승까지 노려볼 수 있는 팀으로 끌어올렸다. 우완 쓰리 쿼터로 140km대의 직구와 110km 안팎의 커브를 던져 타자의 타이밍을 놓치게 했다. 뛰어난 제구력으로 땅볼을 유도해낸 후 마운드에서 씨익하고 웃는 그의 모습에 야구팬들은 ”너구리”라는 별명을 붙였다.
장명부는 던지고 또 던졌다. 83년에는 100경기 중 무려 60경기에 등판했다. 그 중 선발 44번, 완투 36번을 기록했다 선발로 완투하고 이틀 후에 다시 선발로 완투했고, 그 사이에 구원투수로 마운드에 올라가기도 했다. 시즌 30승은 지금도 깨지지 않는 한국 프로야구 기록이지만, 구원, 마무리 등 투수의 역할 분담과 선발 로테이션이 확립된 지금은 있을 수 없는 기록이기도 하다.
투수는 오로지 빠른 공만 던지고 타자는 홈런만 겨냥해 무작정 상대를 제압하려고만 했던 당시 한국 프로야구에서 그는 어떤 마음으로 던졌을까. 당시의 취재에 그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빠른 공을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니다. 내가 여기서 보여주고 싶은 건 프로 의식이다. 맞대결하는 것만이 프로가 아니다. 비기는 것도, 지는 경기에는 어떻게 지는가를 생각하는 것도 프로가 해야 하는 일이다. 자신의 몸을 아끼고 오래 가도록 하는 것도 해야 프로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적극적인 플레이와 위험한 플레이는 완전히 다르다. 나는 그런 것을 내 몸으로 보여주고 싶다.” (세키카와 나츠오 ”해협을 넘어간 홈런”)
장명부와 함께 일본 히로시마에서 삼미로 입단해 내야수로 활약한 이영구(일본명 키야마 에이큐)는 장명부의 마음을 이렇게 대변한다.
“(장명부가)돈 때문에 한국에 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승리의 맛을 맛보게 해주고 싶다는 강한 마음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팀이 우승하면 선수도 성장한다. 전년도의 역사적인 대패를 씻겨 주고 싶었다(고 생각했었다).”
“일본에서 온 교포한테 쉽게 지면 안된다. 장명부를 이기겠다고 힘을 내면 한국 야구도 성장하지 않나. (장명부는) 한국 야구를 강하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무척 강했다.”
그러나 83년의 삼미는 아쉽게도 전・후기 리그에서 모두 2위에 그쳤다. 그해의 어깨 혹사는 장명부의 선수 생명을 감소시켰다. 84년에는 13승 20패, 85년 11승 25패를 기록했던 그는 빙그레 이글스로 이적한 1986년에는 1승밖에 거두지 못했다. 그해가 선수로서의 마지막 시간이었다.
그의 사생활은 엉망진창이었다고 한다. 외국인만 출입 가능한 카지노를 드나들며 이성 관계도 문란했다는 증언이 있다. 박영길 전 롯데 감독은 “(장명부는) 야구 인재로서는 아깝다. 일본이든 한국이든 제대로 생활만 했더라면 지금도 코치로 대우받고 살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83년의 무리한 투구에 대해서는 장명부 자신도 후회가 많았던 모양이다. 은퇴 직후에 한국 방송국 인터뷰에서 “30승은 나도 왜 했는지 (모르겠다)”라고 대답했다.
″첫해 30승 하지 않았으면 더 오래 갔을 텐데?” 라고 기자가 질문하자 장명부는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아깝다. 18년이나 프로야구를 하면서 다른 사람한테 그만두라는 소리를 듣고... 바보 같다.”
다른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1986년에 일본에서 투자 사기를 당했고 한국에서는 빚의 연대 보증인이 된 바람에 한국에서 번 돈도 히로시마에 지은 집도 거의 다 잃었다고 당시 일본 주간지 취재에 대답한 바 있다.
그는 은퇴 후 2개 구단에서 코치를 맡았지만, 코치생활도 오래 하지 못하고 1년 정도로 그만뒀다. 83년의 빛을 되찾으려고 초조해하다 마약에 손을 대고 91년에 경찰에 구속됐다.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나 일본으로 추방된 장명부는 일본에서 여러 직장을 전전했다고 전해진다. 2005년 4월 13일, 장명부는 자신이 경영하던 일본 와카야마현 마작 하우스에서 소파에 누운 모습으로 발견했다. 54세의 외로운 죽음이었다.
마작 하우스 벽에는 “낙엽은 가을바람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자필의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사람은 그렇게 완벽하지 못하다”
영화를 제작한 이영곤 감독은 서울 출신이다. 고등학생이었던 2008년, 그의 집 근처에 있던 목동 야구장에 갑자기 프로야구팀(당시 우리 히어로즈, 현 키움 히어로즈)이 생겼다. 그 전년, 인천에 있었던 현대 유니콘스가 경영난으로 해체, 분열되고 흘러든 것이다. 외야석이 없는 아마추어 전용 구장을 본거지로 한 ”히어로즈”는 처음의 5년간 8팀 중 6~8위를 오가는 약세를 보였다.
우리 히어로즈의 전신은 현대 유니콘스였다. 현대 유니콘스는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해 창단한 구단이다. 태평양 돌핀스는 1988년 청보 핀토스를 인수한 구단이었고, 청보 핀토스는 바로 1985년 삼미 슈퍼스타즈를 인수한 바 있다. 그러니 이영곤 감독이 고등학생 시절 만난 우리 히어로즈의 기원이 삼미 슈퍼스타즈였던 셈이다. 이영곰 감독에게는 과거의 “슈퍼스타”가 눈앞의 “히어로”와 겹쳐 보였다. 그리고 장명부라는 전설의 투수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명부 투수는 영웅으로 기억하기에는 사생활이 안 좋았다. 하지만 그가 좋아하는 야구에는 온몸으로 열정을 아끼지 않았다. 나도 그렇지만 사람이란 그리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완벽하지 못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받는 것만 받고 잊어버릴 것이 아니라”
‘현해탄의 낙엽’은 일제 강점기와 2차 세계대전 등 재일교포가 생겨난 역사적 배경도 함께 부각시키고 있다. 장명부에게는 한국에 이복형이 있었다. 지금도 한국에 살고 있는 장재현 씨에 의하면 그들의 아버지는 1945년에 징용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요즘 정부에서 달래고 있잖.”고 하면서 “팔자가 사납지. 팔자라 할 수도 있고 나라가 그랬잖아....”라고 장재현씨는 탄식했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새로운 가정을 가졌고 장명부가 태어났다.
장명부는 사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일본 각지를 돌아다녀야 했고, 이윽고 생모와도 헤어졌다.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못했고 삼미 팀 동료들, 그리고 형하고 마저도 자유롭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장재현 씨는 이복동생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고 있다. 장명부가 모국방문단 선수로 75년도에 한국에 온 후 서울의 한 호텔 로비에서였다 .“한국말을 못하니까 멍하니 웃고만 있었다. 그냥 만나서, 손이나 잡고, 끄덕이고 있을 뿐. 무뚝뚝한 성격인가 처음에는 생각했다.”
“야구 선진국”에서 온 재일교포 선수들에 대한 눈빛도 부러움과 반감이 섞여있었던 시절이다. 이영곤 감독은 취재 중 잊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박영길 전 감독이 장명부 선수에 대해 “토사구팽”이란 말을 썼다. 이용할 부분은 이용하고 나머지는 버리자는 얘기였다. 그 얘기는 내게 있어서는 슬픈 내용이였기에 영화 본편에는 넣지 못했다.”
“한국이 아직 가난했던 시기에 재일 동포들이 투자 등으로 기여한 것도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받는 것만 받고 나머지는 다 잊어버릴 것이 아니라 오래 기억하고 역사로 계승하는 게 나의 소망이다.”
3월에 대학을 졸업하는 이영곤 감독은 일단 한국에 귀국한 후 다시 취재와 편집을 거듭해 한일 양국에서 극장 공개를 목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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