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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서울 건국대에서 열린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팬미팅’에서 유병재가 팬들과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25일 서울 건국대에서 열린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팬미팅’에서 유병재가 팬들과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와이지엔터테인먼트

쉿, 소리 내지 마! 공포 영화 속 대사가 아니다. 현실이다.

“안에 들어가면 절대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숨소리도 안 돼요.” 처음 보는 이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당부한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글쎄요…. 아주 큰일이 일어나는 건 확실합니다.”

운명의 시간, 25일 저녁 7시. 문이 열린 그곳은 적막 그 자체였다. 800명이 모여있는데도 숨소리가 겨우 들릴락 말락 했다. 명상시간에나 나올 법한 음악만이 들렸다. ‘혹시 이 음악이 우리를 세뇌하는 걸까’ 혼잣말에 옆에 앉은 이가 당부했다.

‘쉿!’

음악에 취해, 침묵에 취해 해롱해롱해질 무렵, 그가 등장했다. 폴짝거리며 온갖 귀여운 척을 하며 뛰어 들어왔는데, 그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박수도 환호도 없었다. ‘대단하다’는 듯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린 그가 책상에 앉아 카톡으로 첫마디를 건넸다. “여러분이 이렇게까지 조용하실 줄은 몰랐어요!” 소리 없는 아우성이 시작됐다.

이날 서울 화양동 건국대에서 열린 유병재의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팬미팅’은 팬미팅 역사에 길이길이 기록될지 모르겠다. 유병재는 팬 800명과 말 한마디 없이 오로지 채팅으로 대화를 나눴다. 무대 앞 화면에 카톡 창 두 개가 띄워졌다. 하나는 유병재가 올리는 글이 보이는 화면이고, 하나는 800명이 동시다발적으로 올리는 단체방. ‘꺄악 귀여워’, ‘병재님 사랑해요’ 애정 가득한 대화가 채팅방을 가득 채웠다. 팬들은 손으로는 휴대폰 자판을 누르면서 눈으로는 유병재를 쳐다보기 바빴다. 객석은 목탁 두드리는 분위기인데, 화면 속은 장터처럼 시끌벅적했다. 유병재가 팬들의 ‘드립’에 빵 터져서 웃으면, 스님 복장을 한 이가 무대 뒤에 앉아 있다 일어나서 죽비로 어깨를 내리쳤다.

유병재가 이런 독특한 행사를 기획한 것은 “제 팬분들이 저처럼 낯가리고 소심한 분들이 많아서”라고 한다. 초등학생부터 어른들까지 세대를 초월하는 그의 팬들은 온라인에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펼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스엔에스)에서 유병재 얼굴 그리기 대회 등을 열면 얼굴을 두리안에 합성하는 등 배꼽 잡는 아이디어가 넘쳐난다. 근데, 실제로 만나면 말이 없단다. 이날도 ‘실물이 더 별로인 건 처음’ 등 팬미팅 내내 카톡으로 실력을 뽐내던 팬들은 정작 말을 하라고 만든 5분 남짓 인터미션(쉬는 시간)에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25일 서울 건국대에서 열린 유병재 팬미팅 무대 장면. 2개의 카톡 창이 띄워져 한쪽에선 유병재가 , 다른 한쪽에선 800명의 팬들이 대화를 나눈다.
25일 서울 건국대에서 열린 유병재 팬미팅 무대 장면. 2개의 카톡 창이 띄워져 한쪽에선 유병재가 , 다른 한쪽에선 800명의 팬들이 대화를 나눈다. ⓒ한겨레

‘고독한 팬미팅’이지만 할 건 다 했다. 카톡으로 팬들과 게임도 하고, 소리 안 내고 밥도 먹고, 음악 없이 한 달간 연습한 빅뱅의 ‘뱅뱅뱅’도 췄다. 초대손님(코미디언 김수용)도 불러 카톡으로 대화했다. “데뷔 8년 만에 처음 하는 팬미팅이어서 남들 하는 건 다 해보고 싶었다”는데, 이 묵언 팬미팅은 유병재의 인기 확인을 넘어 의외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일단 ‘비(B)급 정서’의 인기다. <에스엔엘 코리아>(티브이엔) 작가로 일하다가 극중 ‘극한직업’에서 매니저로 나온 유병재는 수많은 ‘을’들을 대변하며 ‘비급 문화’의 선두주자로 떠올랐다. 당시 <미생>의 인기로 세상의 모든 ‘을’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높았는데, 유병재는 넷플릭스 스탠드업코미디 <유병재: 비의 농담> 등 꾸준히 비급 정서를 담은 콘텐츠를 선보이며 그 중심에 섰다. 이날도 팬미팅 참가자들에게 유병재를 좋아하는 이유를 물어봤더니 “잘난 사람들 많은 세상에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도 아주 멋지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매사에 고마워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유병재의 팬미팅은 팬과 스타의 만남이 달라진 문화도 보여 준다. 과거 스타는 말 그대로 ‘별’이었다. ‘별’이 노래하고 춤추고, 팬들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것이 팬미팅이었다. 스타가 안아주면 자지러졌다. 그러나, 친근한 스타를 좋아하는 시대가 되면서 팬미팅도 다채로워졌다. 2005년 밴드 버즈는 팬들과 함께 뷔페를 먹으며 얘기하는 팬미팅을 열었고, 가수 수지는 2017년 팬미팅 때 기념사진을 찍는 포토월 뒤에 숨어 있다가 팬들이 사진을 찍을 때 뒤에서 나와 깜짝 포즈를 취해주기도 했다. 박해진은 매년 팬들과 연탄 나르기, 나무 심기 봉사도 한다. 한 매니저는 “팬과 소통 창구가 많아진 요즘은 팬미팅도 단순히 춤, 노래가 아니라 팬들과 뭔가를 함께 하는 것을 고민한다”며 “유병재의 묵언 팬미팅은 팬들 취향 저격뿐 아니라, 팬이 아니어도 보러 오고 싶게 만든 독특한 콘셉트로써, 기획의 중요성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유병재는 “사는 게 지옥 같다고 느낄 때 세상에 나도 할 줄 아는 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생각으로 코미디를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 것은 상상도 못 한 일”이라고 했다. 이날 팬미팅은 800석이 단 10초 만에 매진됐고, 그를 보려고 제주·대전·대구 등 장거리를 마다않은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팬미팅 뒤 돌아서는데 뭔가 씁쓸하기도 했다. 2시간 동안 팬들은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지만, 정작 옆자리 사람과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화면으로 함께 밥 먹자고 권했지만, 행사가 끝나고 말없이 터벅터벅 제 갈 길을 갔다. 말 한마디 하지 않은 그 시간이 견딜 만 했고, 전혀 어색하지도 않았다. ‘풍자의 달인’ 유병재답게 이 팬미팅에서 그가 건넨 마지막 메시지는 랜선 속 친구와의 대화에 취해 살며 현실에선 고독한 시대를 풍자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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