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공공서비스 악화와 고물가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폭력 사태로 번지자 극우 국민연합(RN)이 이를 반이민 정책과 치안 강화의 명분으로 활용하고 있다.
시민들의 경제적 불만에서 출발한 시위를 정부의 행정적 실패와 이민 정책의 문제로 연결하면서 내년 대통령 선거를 맞아 정치적 공세를 강화하는 것이다.
폭력 시위사태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국민연합의 유력 대선주자인 마린 르펜 하원의원의 지지율은 34~38%로 선두를 유지했다. 이번 프랑스 시위가 내년 프랑스 대선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인지 주목된다.
마린 르펜 프랑스 국민연합 하원의원. ⓒ EPA=연합뉴스
21일(현지시각) 영국 가디언과 폴리티코 등 외신 보도를 종합하면, 프랑스의 최근 폭력 시위 사태를 둘러싼 정치적 공방은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의 재정 위기와 중도 정치세력의 약화라는 구조적 문제와도 맞물려 있다.
◆ '교육개혁' 요구 시위를 '반이민'으로 포장
프랑스의 시위는 교사 부족과 열악한 교육 환경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항의에서 시작됐다. 그 뒤 고물가와 공공서비스 축소, 정부의 긴축 정책에 반대하는 노동계와 시민단체 등이 가세하면서 전국적 저항 운동으로 확대됐다.
지난 17일에는 프랑스 내무부 추산 55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대부분 평화적으로 진행된 시위는 일부 지역에서 상점 약탈과 공공건물 방화 등이 발생하면서 폭력 사태로 번졌다.
극우 국민연합은 이를 정부가 치안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면서 마크롱 정부를 공격했다.
조르당 바르델라 국민연합 대표는 정부가 폭동과 약탈 앞에서 무기력하다고 비판했다. 르펜 의원도 이민과 재정, 안보 문제를 거론하며 국가가 통제력을 상실했다고 주장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르펜 의원은 노골적인 인종주의적 해석을 자제하면서도 이번 사태를 '무질서한 이민'과 '국가 권위의 상실'이라는 틀에서 설명하고 있다.
극우 정당 '정복!(Reconquête!)'의 창립자인 에릭 제무르는 한발 더 나아가 이민 중단과 외국인 범법자 추방을 요구하며 이번 사태를 "인종 전쟁의 경고 사격"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번 시위의 직접적 원인은 이민 문제가 아니라 교육 환경 악화와 생활고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었다. 그럼에도 극우 정치세력은 일부 폭력 사태를 정부의 이민 정책과 연결하면서 사회적 불만을 치안과 국가 권위의 문제로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 EPA=연합뉴스
◆ 재정 위기와 주류 정치권의 '무능' 파고드는 극우
국민연합이 정부의 치안 대응 실패를 집중적으로 부각하는 배경에는 마크롱 정부가 직면한 경제적·정치적 위기가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심각한 재정적자와 국가채무 문제로 지출을 억제해야 하지만 시민들은 생활비 부담 완화와 공공서비스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가디언에 따르면 프랑스의 국가채무는 국내총생산(GDP)의 약 119%, 재정적자는 GDP의 5.1% 수준이다. 재정 건전성을 위해 지출을 늘리기 어려운 국면이며, 시민 불만을 고려해 지출을 늘리는 건 더욱 어렵다.
여기에 마크롱 대통령은 2024년 조기 총선 이후 의회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국정 운영의 주도권마저 약화됐다. 경제적 불만을 해소할 재정적 여력과 사회적 갈등을 조정할 정치적 기반이 모두 취약해진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연합은 정부의 치안 대응 실패와 이민 문제를 부각하고 있다. 반면 급진좌파 정당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는 긴축 정책과 경제적 불평등을 사회적 갈등의 주요 원인으로 제시하고 있다.
17일(현지시각)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서 고물가에 항의하는 시위대와 경찰 간 충돌이 벌어진 가운데 프랑스 국기를 흔드는 시위 참가자가 불길 옆을 지나가고 있다. ⓒ AFP통신=연합뉴스
◆ 르펜 지지율 34~38% 탄탄, 하지만 과거 두 차례 결선 패배
극우 국민연합이 시위 사태를 반이민 공세에 활용하는 가운데, 유력 대선 주자인 르펜 의원의 지지율은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20일 폴리티코 유럽판이 보도한 여론조사기관 이포프(Ifop)와 피뒤시알(Fiducial)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르펜 의원은 주요 대선 가상 대결에서 34~38%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폭력 사태가 발생한 17일 오후 8시부터 19일까지 진행된 조사에서 르펜 의원의 지지율은 선두에 올라있다. 급진좌파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의 장뤼크 멜랑숑 지도자는 15~20%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물론 높은 지지율이 곧바로 대선 승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대선은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상위 2명이 결선투표를 치른다. 르펜 의원은 2017년과 2022년 대선에서 모두 결선에 진출했지만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에게 각각 33.90%, 41.45%의 득표율로 패배했다.
다만 르펜 의원의 결선 득표율이 두 번의 대선을 지내면서 높아졌다는 점은 주목된다. 이번에 르펜 의원이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며 결선에 진출할 경우 다른 후보들의 '반극우 연대'가 얼마나 위력을 발휘할지가 결선 투표의 승부처가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