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표되는 우리 경제지표를 보면 한국 산업계는 반도체 초호황 사이클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8월1일부터 20일까지 수출 잠정치는 552억 달러로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56% 급증하면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는데 전체 수출액 가운데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47%를 웃돌았다.
반도체 수출 규모는 1년 전보다 3배 가까이 늘어났고 반도체 자체 비중도 22%포인트 넘게 늘어난 것이다. ‘반도체 효과’를 걷어내면 실물 경제를 지탱해야 할 다른 주요 제조업의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달 대한상의의 올해 하반기 국내 산업 기상도에서는 철강, 기계, 건설, 석유화학 등의 산업군의 부진한 업황이 예견되기도 했다. 반도체 호황이 전통 제조업이 직면한 구조적 위기를 가리고 있는 형국인 셈이다.
정부의 '경제구조혁신 추진방향'은 인공지능(AI) 만능주의를 넘어 각 산업군에 꼭 필요한 지원책이 담겨야 할 것으로 보인다. ⓒAI 생성 이미지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8월 초 ‘경제구조혁신 추진방향’을 발표했다.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 하방 압력이 지속되는 가운데 반도체를 넘어 모든 산업구조를 혁신하겠다는 목표에서 나온 전략이다.
현재 상황이 경제 구조전환의 절심함이 크다는 정부의 상황 인식은 적합해 보인다. 그러나 산업 현장의 맥락에서 혁신의 미래를 살펴보면 ‘AI 만능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정부는 산업구조 혁신의 추진방향으로 주력 산업에 ‘AI의 옷’을 입히겠다는 점을 강조했다. 생산성 제고가 시급하고 AI 생태계를 주도하기 위해 피지컬 AI 선점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문제는 각기 다른 위기에 처한 산업군을 향한 대책이 지나치게 획일적이라는 점이다. 세부 추진방향을 보면 사실상 모든 분야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전략이 ‘해당 산업 특화 AI 제조공정 혁신’이다.
물론 AI 패러다임이 단순 연산과 추론을 넘어 물리적 영역인 '피지컬 AI'로 확장되는 것은 글로벌 추세다. 정부가 이에 발맞춰 산업 전반에 피지컬 AI 도입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방향성 자체는 틀리지 않아 보인다. 10대 주력산업에 특화한 휴머노이드 개발, 연간 1천 대 규모의 AI 로봇 보급, 로봇 데이터 팩토리 설립 등은 기술 경쟁력 확보 측면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주력 제조업이 직면한 현재의 위기는 단순히 공정 내 AI 도입 부재, 생산성 악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철강과 석유화학 산업은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중국의 저가 물량 공세 속에서 기초적 원가 경쟁력 저하를 겪고 있다. 조선업은 수주잔고 확대에도 불구하고 숙련공 부족 현상과 하청구조 문제 등 고질적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자동차 산업은 전기자동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 장기화와 주요국의 보호무역주의, 중국산 저가 전기차의 거센 공세라는 다중 위기에 직면해 있다. 바이오 산업 또한 글로벌 위탁개발생산(CDMO) 시장의 수주 경쟁 심화와 대규모 연구개발(R&D) 자금 조달이라는 근본적 장벽에 부딪혀 있다.
생산성을 개선하고 현장에 로봇을 투입하거나 AI 팩토리를 구축하는 것만으로는 구조적 한계에 다다른 주력 산업의 근본적 위기를 해소하기 어려운 이유다. 각 산업군이 직면한 위기의 본질이 ‘기술의 부재’라기보다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산업 생태계 자체의 변화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도 이런 문제를 인지한 듯 경제구조혁신 추진방향에 주력 산업별 세부 고도화 방안을 순차적으로 마련하겠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올해 4분기에 철강산업 기본계획과 석유화학 종합지원방안, 바이오 분야의 신약개발 종합 로드맵 등을 발표하고 2027년에는 전기차 제조 AI 공통 플랫폼 개발과 바이오소부장 R&D 로드맵 등을 내놓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곧 세부 대책이 나올 테니 기다려보라’며 안도하기에는 그 뼈대가 되는 이번 핵심 기조가 지나치게 AI라는 단일 방향성에 맞춰져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이미 ‘피지컬 AI 선점’과 ‘모든 산업의 제조공정 혁신’에 맞춰진 상태에서 앞으로 발표될 하위 대책들 역시 AI를 필두로 한 장밋빛 미래에 맞춰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획일적 뼈대 위에서는 유연하고 정교한 맞춤형 살이 붙을 수 없다. 다가올 4분기부터 잇따라 발표될 개별 산업 대책들은 ‘AI 만능주의’ 프레임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철강과 석유화학 지원방안에는 한계 기업의 사업 재편을 유도할 퇴로 확보와 고부가·친환경 전환을 위한 도움이 중심에 서야 한다. 자동차 분야에는 통상 장벽을 뚫어낼 전략 등 실체적 생존전략이 담겨야 하고 바이오 산업에는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신약개발의 자금조달 병목을 해소할 실질적 지원책이 뒷받침돼야 한다.
정부는 지금이 ‘대체불가 대한민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구조 전환의 골든타임이라고 강조했다. AI라는 최첨단 기술은 체질 개선을 돕는 도구일 뿐 개별 산업이 직면한 구조적 한계와 대외 불확실성을 단숨에 돌파할 만능열쇠가 될 수는 없다. 다가올 정책들이 겉보기에만 화려한 기술 덧칠하기를 멈추고 각 산업의 취약점을 정교하게 개선할 ‘맞춤형 핀셋 처방’을 제시할 때 비로소 진정한 제조업 구조 혁신이 닻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