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두산에너빌리티 대표이사 회장이 가스터빈 사업의 눈높이를 상향 조정했다. '누적 수주 100기' 목표 시점을 크게 앞당기면서 자신감을 나타낸 셈이다.
박 회장이 인공지능(AI) 산업 확산이 불러온 가스터빈 수요 증가세에 발맞춰 사업 확장에 공격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는 글로벌 원전 시장에서 핵심 퍼즐로 주목받고 있는 두산에너빌리티의 새로운 성장 축을 마련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두산에너빌리티가 개발하고 제작한 380MW급 가스터빈 제품. ⓒ두산에너빌리티
8일 두산에너빌리티와 발전업계 안팎을 종합하면 최근 두산에너빌리티가 가스터빈 100기를 수주하겠다는 목표 시점을 4년 앞당긴 것은 AI 산업 성장에 따른 하이퍼스케일(초거대 규모) 데이터센터 수요 증가가 배경에 깔린 것으로 분석된다.
2024년 두산에너빌리티는 2038년까지 가스터빈 누적 수주 100기 이상을 달성하고 이 시점까지 유지보수 및 부품교체 등 가스터빈 서비스 사업에서도 연간 매출 1조 원을 올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최근 실적발표와 함께 가스터빈 누적 수주 100기 이상과 서비스 사업 연간 매출 1조 원 달성 시점을 2034년으로 앞당겨 제시했다. 2034년 기준으로 보면 기존에는 78기를 수주하겠다는 계획이 110기로 늘어난 것이다.
이는 AI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데이터센터 건설이 줄을 이었고 가스터빈 수요도 동반 상승하는 시장 상황을 반영한 목표 상향 조정이다.
이전까지 데이터센터는 외부에서 전력을 끌어다 썼지만 AI 시대를 맞이해 전력망 확충 속도가 급증하는 데이터센터 조성 속도를 따라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에 빅테크들이 자체적으로 전력을 확보하는 '온사이트(On-Site)' 발전으로 돌파구를 찾고 있어 가스터빈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 전문지 가스터빈월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전 세계에서 계획 또는 설계 단계에 있는 데이터센터 프로젝트는 모두 7895개, 가치는 약 2조7천억 달러(약 4천조 원)에 이른다. 그리고 데이터센터에서 필요한 전력은 재생에너지뿐 아니라 천연가스를 활용한 가스터빈이 적지 않은 부분을 담당할 것이라고 바라봤다.
올해 1분기 두산에너빌리티는 전 세계에서 데이터센터가 가장 활발히 지어지고 있는 북미에서 눈에 띄는 가스터빈 수주 실적을 확보했다. 연초부터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는 셈이다.
두산에너빌리티는 1분기 가스터빈 관련 수주 2조 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연간 가스터빈 수주 규모인 1조3천억 원을 1개 분기 만에 넘어섰다. 1분기 전체 수주인 2조8천억 원 대부분을 가스터빈으로 채우기도 한 것이다.
지난 3월 미국 한 기업과 380MW(메가와트)급 가스터빈 7기 공급계약을 맺은 것이 1분기 수주 호조의 핵심으로 작용했다. 380MW급 가스터빈은 두산에너빌리티 최초 모델인 270MW급의 후속 제품으로 글로벌 선도기업과 경쟁할 수 있는 출력 수준이다. 두산에너빌리티는 현지 데이터센터에 가스터빈 및 발전기를 2029년 5월부터 매달 1기씩 순차적으로 공급한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지난해 10월 미국 기업에 2기 공급계약으로 첫 가스터빈 수출이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가스터빈 종주국인 미국 시장에 처음으로 국산 가스터빈을 공급하기로 한 성과인데 반년여 만에 최근 수주를 포함해 현지 시장에 모두 12기를 공급하는 계약을 따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올해 추가로 1조 원 이상을 더해 연간 3조2천억 원의 가스터빈 신규수주를 목표로 하고 있다.
박지원 회장은 '국산화'라는 목표 아래 오랜 기간 가스터빈 개발을 거쳐 사업을 준비해왔다. 두산에너빌리티가 가스터빈 첫 개발에 돌입한 시점은 2013년으로 13년 만에 본격적으로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게 됐다.
두산에너빌리티는 2013년 정부가 추진한 '한국형 표준 가스터빈 모델 개발' 국책과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이전까지 해외 제품에 의존했던 발전용 가스터빈의 국산화를 목표로 해왔다.
두산에너빌리티가 2019년 가스터빈 기술개발에 성공함에 따라 미국과 독일, 일본과 이탈리아에 이어 한국이 5번째 독자모델을 보유한 나라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박 회장은 2019년 당시 "매우 중대한 하나의 결실"이라며 가스터빈 개발의 의미를 강조하기도 했다.
박 회장은 기기 공급 뒤 유지보수, 부품교체 등의 서비스 사업도 일찍이 준비하면서 가스터빈을 두산에너빌리티의 핵심으로 키우기 위한 노력을 이어왔다.
두산에너빌리티는 2017년 미국에서 가스터빈 핵심 부품에 관한 서비스 사업을 운영하는 ACT를 인수해 DTS(두산터보머시너리서비스)로 출범시켰다. 미국 휴스턴에 위치한 두산에너빌리티 자회사 DTS는 지금도 서비스 역량을 토대로 가스터빈 수주에 힘을 보태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국내 유일의 원전 주기기 제작기업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상황에서 AI를 타고 가스터빈이라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추가했다는 의미가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조재원 키움증권 연구원은 "두산에너빌리티는 글로벌 메이저 가스터빈 기업들이 앞서갔던 길을 뒤따르고 있다"며 "가스터빈 공급보다 수요가 늘어나면서 두산에너빌리티의 판매 단가 상승 및 수익성 개선 효과는 시간이 지날수록 지속해서 강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두산에너빌리티의 가스터빈 사업이 지닌 확장성은 박 회장이 추가 사업기회를 모색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먼저 가스터빈의 성과는 스팀터빈 수주도 함께 늘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가스터빈은 천연가스를 활용해 발전하는 데 이 과정에서 나오는 고온의 배기가스로 물을 끓이고 고압 증기를 만들어 스팀터빈에서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두산에너빌리티도 "북미 시장 발주 특성상 가스터빈 제조사가 스팀터빈까지 수주하기 때문에 사업규모가 확대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두산에너빌리티에 따르면 회사는 최근 5년 동안 석탄화력 및 중국을 제외한 300MW 이상 스팀터빈 시장점유율(25%)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두산에너빌리티는 가스터빈의 연료를 수소로 바꾼 친환경 수소터빈, 가스터빈과 구조적으로 비슷해 시장 진출이 유리한 항공엔진 분야에서도 사업 확장을 도모하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2028년까지 연료 전부를 수소로 사용하는 수소전소 터빈을 개발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또 대한항공,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등 국내 항공기 체계 기업 2곳과 협력관계를 맺고 항공엔진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 관계자는 "미국에서 가스터빈 수주에 속도를 높일 수 있는 데는 검증된 성능, 빠른 납기, 미국 현지 자회사의 서비스 지원이 있다"며 "지금까지 미국에 가스터빈 12기를 공급하게 돼 글로벌 플레이어로 입지를 다지게 됐는데 앞으로도 경쟁력 있는 제품을 제공해 국내외 수요 증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