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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정지우 | 출연 전도연, 최민식, 주진모 | 1999

공동 주택의 긴 복도를 걸어오는 여인. 멀리서 보면 어느 집에 들어가는지 알 수 없는 그곳에서 여인은 연인의 보금자리로 들어간다. 그리고 아무 설명 없이 시작되는 러브신.

선생님 풍의 정장 속에 숨겨져 있는 백색의 언더웨어가 노출되고 비음 섞인 여인의 탄성이 들려오면 이미 관객들은 침 삼키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영화 속에 녹아든다. 관객들은 두 사람의 격정적인 정사가 끝나고 나서야 '여주인공 보라가 지금 사랑을 나눈 상대 일범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이 영화 '해피 엔드'의 충격적인 오프닝 신이다.

한국 영화 사상 최강의 러브신 '해피 엔드'

영화 <해피 엔드>는 전국 관객 114만이라는, 당시엔 대단한 박스 오피스 성적을 기록했던 작품이다. 1999년은 <쉬리>와 <주유소 습격사건> 등의 히트작이 등장하면서 한국 영화의 시장이 점차 확대되던 시기다.

전도연은 <밀양>으로 한국 최초로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그야말로 역사상 최고의 여자 배우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전도연과 칸의 인연을 만들어준 작품이 바로 <해피엔드>였다. 2000년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되기도 했던 <해피 엔드>는 어려 보이는 인상으로 어필하는 '평이한 여배우 전도연'을 '독하고 진한 연기의 화신 전도연'으로 전환시킨 작품이다.

<해피 엔드>같이 노골적인 성애 영화가 아닌 작품에서 영화감독들은 배우들에게 체위를 지정해 주거나 어떤 특정한 동작을 할 것을 지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전도연과 주진모가 만들어낸 케미스트리의 밀도만을 평가한다 하더라도 3분30여초 동안 펼쳐지는 그들의 첫 번째 정사는 그야말로 한국 영화사상 최강의 러브신 중 하나다. 노출의 정도나 체위의 사실성,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등장한다는 의외성까지 모든 것이 관객들에게 알려진 여배우가 노출을 했다는 것 이상의 본능적 충격을 전달한 바 있다.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의 사랑을 가장 충실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은 보라와 일범이 두 번째 러브신을 시작하기 전 침대에 누워 천정에 영사되고 있는 아프리카 얼룩말의 모습을 보고 있는 장면이다. 한 곳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이 일치한 가운데 가슴에, 그리고 어깨에 닿아 편안하게 상대를 애무하고 있는 손끝의 모습에서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필요로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불편한 공간일 수밖에 없는 불륜의 공간에서 행복과 편안함을 느끼는 보라의 모습이 바로 전 장면인 남편 민기(최민식)와의 무표정한 정사 장면과 대비되면서 관객들을 동화시키는데 성공한다. 첫 번째 러브신이 격정적인데 비해 두 번째 러브신은 그 동작이나 감정이 부드럽고 편안하다. 하지만 더 행복하게 느껴지는 만큼 이 아름다운 정사가 불륜의 산물이라는 아쉬움과 슬픔은 더욱 커진다.

이전까지 무명에 가까웠던 주진모는 운동과 무용으로 다져진 몸매를 과시했을 뿐만 아니라 이 진중한 스릴러 영화 속에서 과묵한 일범의 성격을 잘 표현해냈다. 10년이 지난 후 역시 러브신으로 화제가 된 <쌍화점>을 통해 다시 한 번 인기와 실력을 확인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또한 이 영화로 주목받은 감독 정지우는 그로부터 13년 후, 여고생의 파격적인 정사가 담긴 영화 <은교>로 다시 한 번 흥행의 맛을 볼 수 있었다. '한국 영화 사상 최강의 러브신'은 우연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 이 글은 필자의 전자책 '한국영화 사상 가장 에로틱한 순간 51' (페이퍼크레인, 2015)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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