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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막내아들' 포스터, 스틸컷. ⓒJTBC
'재벌집 막내아들' 포스터, 스틸컷. ⓒJTBC

재벌은 왕가다. 왕조가 사라진 공화정 시대, 혈통을 따라 자산과 권력을 재생산하는 재벌은 늘 왕조에 은유되거나, 혹은 왕조의 은유로 활용되었다.

멜로드라마 속 재벌 2세는 여자 주인공을 구해주러 온 ‘백마 탄 왕자님’이고, 형제들끼리 차기 회장직을 두고 격돌하는 승계 구도 싸움은 ‘왕자의 난’이라 불렸으며, 맨주먹으로 시작해 거대 기업을 키워낸 재벌의 창업기는 ‘건국 신화’로 환원되지 않나. <용의 눈물>과 <여인천하> 등으로 시대를 풍미했던 사극 전문 작가인 이환경 작가가 삼성과 현대의 창업기를 다룬 <영웅시대>를 집필한 건 우연이 아니다. 현대 한국에서 재벌은 사실상 왕조다.

 

삼성가 떠오르는 ‘아슬아슬 판타지’

재벌 개혁이 좀처럼 잘 이뤄지지 않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영국인들이 왕정을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왕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한국인들은 재벌 개혁을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재벌을 사랑하고 선망한다. 국외에서 마주치는 삼성과 현대, 엘지의 광고를 보고 뿌듯해하고, 친척이 재벌 계열사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축하를 건넨다. 재벌의 부패상을 고발하고 개혁을 이야기하는 이들을 응원하면서도 동시에 재벌을 사랑하는 것은 모순적이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우리는 홍길동과 임꺽정 같은 의적의 이야기를 사랑하는 동시에, 세종이나 정조와 같은 성군을 사랑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권력에 저항하는 동시에 은밀하게 권력을 선망한다.

재벌이 사실상의 왕가라면, 재벌을 다룬 서사는 사극이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제이티비시>(JTBC)의 하반기 최고 화제작 <재벌집 막내아들>은 은연중에 퓨전 사극으로서의 속성도 같이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온갖 굴욕을 견디며 ‘순양그룹’의 충실한 종복으로 살아온 직장인 윤현우(송중기)는, 후계 승계 작업과 관련된 순양가 내 권력 다툼에 휘말려 억울한 죽음을 맞는다. 의식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난 윤현우는, 자신이 시간을 거슬러 1987년에 와 있으며 제 신분이 창업주 진양철(이성민)의 막내 손자인 진도준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도준으로 살아가게 된 현우는, 이제 미래에서 익히고 온 역사적 흐름에 대한 지식을 활용해 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 순양을 집어삼키려 든다.

주인공 현우는 순양그룹을 삼켜 전생의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들에게 복수하겠다는 야심으로 가득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기업을 인수할 때 고용승계를 고집하는 어진 마음과 “머슴은 잘해주면 지들이 주인인 줄 안다”고 말하는 창업주 진양철을 은밀히 경멸하는 정의로움도 같이 가진 존재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저항’의 서사인 동시에 그렇다고 권력을 아주 무너뜨리지는 않는, 적당히 혁신하는 선에서 마무리하는 서사,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나. 어질고 정의로운 젊은 왕족이 부패한 왕실을 개혁하는 서사, <해를 품은 달>이나 <구르미 그린 달빛>, <킹덤> 등의 퓨전 사극이 그렸던 내용과 그리 멀지 않다.

<재벌집 막내아들>이 흥미로운 건 퓨전 사극의 특징을 고스란히 가진 채 당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퓨전 사극은 종종 당대의 욕망을 투사하는 안전한 그림판으로 기능했다. 현실의 답답함을 당대 이야기로 풀어내는 건 이해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다소 민감할 수 있다. 그래서 사극 제작자들은 이미 과거완료 시제인 조선 시대에 은유함으로써 그 위험을 우회했다. 어차피 오래전 조선의 이야기인데 아무려면 어떤가.

그러나 1980년대 말에서 출발해 2000년대 초반을 향해 가고 있는 <재벌집 막내아들>은 당대의 이야기이기에 퓨전 사극 특유의 ‘안전한 판타지’라는 안전핀이 없다. <재벌집 막내아들>은 누가 봐도 범삼성 가문의 이야기로 읽히고, 진양철 회장을 보며 사람들은 이병철 삼성 창업주를 떠올린다. 극 중 한도철강 인수전은 삼성의 한보철강 인수 시도를, 자동차 산업에 대한 진양철의 집착은 무리해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었던 삼성의 행보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특성은 <재벌집 막내아들>을 얼핏 과감한 스토리텔링으로 재벌가를 비판하는 작품처럼 보이게 만든다. 작품을 향한 사람들의 열광 이면에는 이와 같은 심리가 도사리고 있다는 걸 부정하기 어렵다. 힘없던 샐러리맨이 누가 봐도 삼성인 재벌집 막내로 다시 태어나, 빼어난 기지와 지식으로 재벌가의 추악한 약점을 파헤치고, 그를 이용해 재벌가를 집어삼켜 복수하는 서사 아닌가. 사람들은 창업주의 첫째 아들 진영기(윤제문)와 기회주의자 둘째 진동기(조한철)의 무능이 폭로될 때 통쾌함을, 그들이 도준(의 삶을 살고 있는 현우)의 기지에 당할 때 짜릿함을 느낀다.

'재벌집 막내아들' 스틸컷. ⓒJTBC
'재벌집 막내아들' 스틸컷. ⓒJTBC

 

방점 찍힌 곳은 재벌? 판타지?

하지만 이 작품이 방영되고 있는 채널이 범삼성 가문의 일원인 <제이티비시>라는 아이러니는 쉬운 환호를 머뭇거리게 한다. 어쩌면 자본이 기꺼이 이와 같은 서사에 투자한 건, 어차피 불가능한 판타지인 ‘회귀물’(현재를 사는 평범한 주인공이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어느 시점에 살게 됨으로써, 다른 이들에겐 없는 역사적 지식을 활용해 히어로가 된다는 판타지 문학의 한 서브 장르. 웹소설이나 웹툰에서 흔히 쓰인다)이니 현실적인 타격이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의 발로 아니었을까? 나아가 노골적인 암시로 순양의 모델이 삼성임을 모두가 안다 한들, 그래 봤자 그것이 삼성을 향한 시민들의 이미지에 이렇다 할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극 중 영화 <타이타닉>에 거액의 제작비를 투자한 투자 전문가 오세현(박혁권)은 제 결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부자들이 골탕 먹는 얘기야. 사람들이 극장에 달려올 수밖에 없어. 현실에는 없는 얘기니까.” 아무도 <타이타닉>을 그렇게 기억하지 않는다는 걸 고려한다면, 이는 제작진이 <재벌집 막내아들>을 보는 시선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방점은 ‘현실에는 없는 얘기’에 찍혀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현실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는 개혁 서사만큼 개혁 대상을 안심시키는 것도 드물다.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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