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을 든 사람, 김윤아 섭식장애 전문 상담사. ⓒHelena Lopes on Unsplash/김윤아 상담사
"야, 너 왜 이렇게 말랐어?"
오랜만에 본 당신이 내게 묻는다. "그런가?" 나는 어깨를 으쓱한다. 마치 모종의 이유로 잘 못 챙겨 먹어서 '어쩔 수 없이' 살이 빠진 것처럼. 그런데 그 사실을 방금 당신의 말을 듣고서야 알아차린 것처럼.
그렇게 당신과 헤어지고 집에 도착한 나는 저녁을 딱 세 숟갈 먹고는 "입맛이 없다"며 침대에 쓰러져 몇 시간이고 인스타 피드에 뜨는 음식 사진을 양옆으로 위아래로 넘겨 본다. 하얗고 굵은 치즈가 뱀처럼 똬리를 튼 엽떡, '혈관파괴' 수제버거, 노르웨이에서 공수해 온 연어사케동. 나는 다 먹고 싶다. 하지만 먹을 수 없다. 먹으면 살이 찔 것이고 살이 찐 나는 보기 흉할 것이며 보기 흉한 나는…
살을 뺐다. 목표는 '만족할 때까지'. 끼니를 줄이고 칼로리를 제한했다. 그러다 '입이 터지면' 두 배, 세 배를 먹었다. 먹는 양이 조절이 안 됐다. 이거, 다이어트 맞아? 만약 섭식장애 전문 상담사를 찾아가 이렇게 물었다면 단호하게 "아니" 하는 답이 돌아왔을 거다.
ⓒ김윤아 상담사
"사실 누구나 다이어트를 한다. 특히 한국 사회에 있으면 밥 먹듯이 다이어트를 한다. 하지만 다이어트와 섭식장애는 분명히 다르다."
4년 차 섭식장애 상담사 김윤아 씨가 화면 너머로 말했다. 직장인이 가장 설레는 시간 금요일 오후 4시, 우리는 코로나 시대의 만능열쇠 줌을 통해 섭식장애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섭식장애와 다이어트의 차이?
다이어트를 한다고 해서 반드시 섭식장애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다이어트와 섭식장애는 모두 식사와 몸에 대한 통제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대체 어디까지가 다이어트고, 어디부터가 섭식장애일까?
체중계에 올라선 사람. ⓒyunmai on Unsplash
"의지로 조절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다. 다이어트를 너무 심하게 해서 일상생활이 아예 굴러가지 않을 때, 해야 하는 일을 할 수 없을 때, 사회생활을 제대로 못 할 때는 조절이 안 되는 거다. 또 먹는 것 때문에 약속 자리에 나가는 게 무서워져 약속을 취소한다든지, 다이어트나 음식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학업 등에 집중할 수 없어서 점점 힘들어지는 것도 비슷한 예다." 음식을 과하게 거부하는 거식증과 과하게 취하는 폭식증은 모두 섭식장애의 증상이다.
국내 섭식장애 환자는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한국의 섭식장애 환자 수는 2017년 8100여 명에서 2021년 1만 900명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다수의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들은 집계된 환자 수 1만 명을 '빙산의 일각'으로 보며 실제 환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했다. 환자들이 섭식장애를 병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낮다는 이유에서다.
"나 섭식장애인 듯!" 시원한 고백 어려운 이유
"감기 걸리면 감기 걸렸다고 하고 생리통 있으면 생리통 있다고 하는데, 섭식장애는 그러기가 어렵다." 내가 말했다. 김윤아 상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윤아 상담사
"먹는 것 정도는 자신이 조절해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가 있다. '그거 하나 조절 못하는 사람은 게으르고 자기 관리 못하고 통제를 못하는 사람이다'라고 보는 거다. 수치스럽고, 실패를 드러내는 것 같아 말하기 어렵다."
섭식장애의 '볼드모트'화는 병을 만성화시키는 이유 중 하나다. 김윤아 상담사는 "비밀로 하는 게 오히려 더 병을 키운다. 예전에는 우울증이 비슷한 포지션이었는데, 이제는 병원 가서 치료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잖나. 섭식장애는 그 인식이 더 개선돼야 한다. 다이어트와 경계선에 있기 때문에 더더욱"이라며 사회 통념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섭식장애 자녀와 상담소 찾는 부모에게 건네는 말은?
섭식장애를 치료해야 한다는 인식이 부족한 탓일까. 김윤아 상담사가 운영하는 심리상담센터 '나를 만나는 시간'의 문턱을 넘은 환자들은 대부분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 동안 섭식장애를 겪어온 이들이었다.
심리상담센터 '나를 만나는 시간' 내부. ⓒ김윤아 상담사
심리상담센터 '나를 만나는 시간' 내부. ⓒ김윤아 상담사
"책도 읽어봤다가, 다이어트 방법도 바꿔봤다가, 한약도 먹어봤다가… 여러 방법을 다 써본 다음에 이게 '혼자서는 절대 안 되는구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상담하러 오신다." 어렵사리 문을 두드린 환자들 대다수는 2030 여성이었다. 드물게 10대도 있었다.
"10대가 자발적으로 상담 센터에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10대가 오는 경우는 상황이 심각한 때, 부모님이 보시기에 너무 심각해서 데려오는 때다. 몸무게가 30kg까지 빠진다던가, 너무 심해서 학교에도 못 갈 지경에 이르렀다든가 하는 경우 말이다."
내 아들, 딸이 섭식장애를 겪는다면 어떡해야 할까. 김윤아 상담사가 자녀들과 센터를 찾는 부모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최선은 없다. 최악만 피하자."
"센터에 오시면 제게 '어떻게 하는 게 좋냐'고 물어보신다. 사실 정답은 없다. 그래서 '최악만 면하시면, 나중에 애들은 다 안다' 이렇게 말씀 해드린다." 그가 피하기를 권하는 '최악'은 바로 비난이다. 섭식장애의 원인을 자녀의 게으름과 의지 부족으로 돌리며 '그런 것 따위로 병원을 가냐' '다른 애들도 다 그런데 너무 유난스럽다' 등의 질타만큼은 피하자는 것이다.
악깡버 금지! 치료 받을 용기
섭식장애 환자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다. 혼자서 버티지 않을 용기. "나 혼자 견디고 참고 악으로 깡으로 버티다 보면 몸이 너무 망가진다. '내 몸을 내 의지로 조절 못 할 수도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면 좋겠다. 적극적으로 주변에 도움을 청해라. 나만 이상하고 유난스러워서 이 병을 겪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립되거나 자책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김윤아 상담사는 전했다.
3월 10일 줌으로 만난 김윤아 상담사. ⓒ허프포스트코리아
섭식장애에 걸리는 이유는 다양하다. 획일적 미의 기준, 미디어, 개인적 사연 등. 원인이 복합적이니 치료에도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상담, 약물, 식단 치료 를 통해 점차 극복해나갈 수 있다고 김윤아 상담사는 말했다. 그의 센터를 찾은 내담자들은 다음과 같은 치료 후기를 남겼다.
"완전히 섭식장애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 단계 벗어나서 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불안의 강도가 확실히 줄었다."
"성장과정과 제 성향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그동안 쌓였던 감정들을 많이 해소했다. 삼시 세끼와 세 번의 간식을 챙겨 먹으며 폭식이 멎었고, 체중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여기서 더 깡마르지 않아도, 저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를 전보다 아름답게 봐줄 수 있게 됐다."
"극복 후에 내가 즐거워하는 많은 일들을 하고 예전처럼 정말 바쁘게 지낸다. 그리고 '나 자신 오늘도 잘했다! 멋졌다!' 하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하니까 섭식장애가 있던 시기가 후회됐다. '이렇게 행복한걸..'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