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범죄 장르물에서 여성 드라마 피디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심나연 피디가 <괴물>을 연출하는 장면. ⓒJTBC
범죄 장르물 <괴물>(제이티비시)이 10일 자체 최고 시청률(6%)로 막을 내렸다. 범인이 김칫독에서 김치를 꺼내는 단순한 장면조차 카메라가 아래에서 위로 훑으며 살기를 구도에 담았다. 치밀하게 짠 앵글에 섬세한 심리 묘사를 더한 드라마는 묵직한 분위기로 몰입감을 높였다.
이 대목에서 편견이 튀어나온다. “어, 피디가 여자였어?” 드라마 게시판에 “보통 이런 묵직한 범죄물은 연출자가 남자인 경우가 많았다. 별뜻, 별생각 없이 남자려니 했다”는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괴물>을 연출한 심나연 피디는 2019년 <열여덟의 순간>으로 데뷔한 신인이다. <괴물>은 두번째 장편 연출작이자 첫 장르물이다. 그는 <한겨레>와 한 서면 인터뷰에서 “대본을 읽어보니 시작부터 재밌어서 선택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무거울 수밖에 없는 스릴러라는 장르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지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었어요.”
김희원 피디가 연출한 <빈센조>의 장면. ⓒTVN
과거 남성 연출자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장르물 드라마에서 여성 피디의 활약이 도드라지고 있다. <티브이엔>(tvN)에서 방영 중인 <빈센조>도 그렇다. 1회에서 빈센조(송중기)가 이탈리아 포도원에 불을 지르는 장면은 웅장함으로 눈길을 끌었는데, 그 대담한 연출에 박수를 보낸 이들이 많았다. 이를 진두지휘한 김희원 피디는 경력이 10년을 넘는 베테랑 여성 피디. 이미 <돈꽃> <왕이 된 남자> 등으로 드라마 팬들 사이에서 자기만의 감성으로 독특한 연출을 펼치는 피디로 일컬어진다. 7회에서 재개발 건물을 지키려는 자들과 무너뜨리려는 자들의 싸움을 외젠 들라크루아의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 빗대 표현한 대목은 그의 장기가 제대로 드러난 장면으로 꼽힌다.
방송통신위원회가 발간한 <2020년 방송산업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지상파 3사 피디 직군 2472명 중 여성은 822명(33%)이다. 2000년대 초 여성 피디 비율이 10% 남짓이었던 것에 견주면 그나마 늘어난 수치다. 예능에서 이름을 날린 여성 피디들이 눈에 띈 데 반해, 드라마에선 유독 여성 피디의 성장이 더뎠다. 1990년대까지 지상파 3사 기준으로 드라마를 연출한 여성 피디는 1981년 <한국방송>에 입사한 박영주 피디가 유일했다. <문화방송>에선 2005년에야 여성 드라마 피디의 연출작이 등장했다. 2008년 데뷔 기준으로 여성 피디는 지상파 3사 합쳐 4명뿐이었다.
최근 범죄 장르물에서 여성 드라마 피디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심나연 피디가 <괴물>을 연출하는 장면. ⓒJTBC
<괴물>의 심나연 피디는 “예전에는 확실히 여성 피디가 적었다. 더구나 드라마 피디가 될 기회는 더 희박했다. 과거 드라마는 지상파 중심으로 제작됐는데, 공채 방식의 방송사가 드라마 피디로 여성을 채용하는 경우는 극히 적었다. 하지만 요즘은 채널도 많아졌고 우수한 인력도 많아져 기회의 장이 넓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방송>은 72명 중 20명이, <문화방송>은 45명 중 15명이 여성 드라마 피디다. 종합편성채널, 케이블채널, 외주제작사 등을 더하면 더 많을 것으로 업계에선 추정한다.
시대가 변하고 여성에 대한 편견이 깨지면서, 오히려 여성이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감성과 결이 장점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여성에 대한 방송계 편견 중 하나는 체력이다. 한 지상파 간부 출신 드라마 피디는 “장시간 촬영해야 하는 현장에서 여성은 체력적으로 견디기 힘들 거라는 선입견이 존재했다”며 “여자 혼자 50~100명의 스태프를 이끌 수 없을 거라는 편견도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지상파의 여성 피디는 “과거엔 스태프 대부분이 남자다 보니 그 가운데 일부러 권위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이도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요즘은 촬영 환경이 개선된데다, 협업이 더욱 중요해졌기에 여성 특유의 소통 능력이 빛을 발하는 사례가 늘었다.
김희원 피디가 연출한 <빈센조>의 장면. ⓒTVN
여성 드라마 피디가 연출하는 장르도 과거보다 더 다양해지고 있다. 국내 최초 여성 드라마 피디인 박영주 피디가 주로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연출했다면, 이후 등장한 여성 드라마 피디들은 로맨틱코미디 등 멜로에 집중했다. 최근엔 <괴물> <빈센조>처럼 범죄 스릴러, 형사물, 무거운 심리극 등 묵직한 내용의 드라마에 집중하는 경향이 도드라진다. 심나연 피디는 “성별 문제라기보단 최근 들어 드라마 제작, 기획, 편집 등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여성 인재들이 활약하는 덕분”이라고 말했다.
여성 피디로서 고민도 있다. 심나연 피디 말대로 “결혼, 임신, 육아 등 여자라면 누구든 할 만한 고민들, 예컨대 경력단절 같은 것”이다. 그는 “여성 피디로서 일과 가정의 밸런스를 어떻게 지켜야 할지 답을 찾고 있다”며 “저 말고도 앞으로 활동할 여성 후배 피디들이 많다. 그들의 활약을 기대해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