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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의 무의식
ⓒ뉴스1

내가 5·18 기념재단을 찾아갔던 날, 재단 문화센터의 1층에서는 "일구구칠 망월"이라는 제목을 걸고 임무택씨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1997년은 광주 사람들에게, 아니 더 넓게는 이 땅의 민주화를 열망했던 사람들에게 어떤 이정표가 세워진 해라고 말해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명실상부하게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일을 이해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으로 꼽을 수 있겠지만, 사람들에게 크게 알려지지 않은 자리에서 다른 일들도 진행되고 있었다. 1980년 5월, '폭도'라는 이름으로 학살당해 망월동 광주시립묘원 제3묘역에 묻혔던 고인들의 주검이 다시 수습되어 운정동 국립묘지로 이장하게 된 것도 1997년의 일이다.

임무택씨의 전시 사진은 그 이장의 과정을 필름에 담은 것이다. 그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슬픔이나 비애라고만 말하기 어려운 이상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청소차나 손수레에 실려와, 쓸모없어진 물건들이 처리되듯 함부로 묻혔던 사람들의 시신들이 백골이 되어 드러난다. 그 시신들이 온전할 리 없다. 총을 맞아 부서져 버린 뼈들, 열일곱 해 동안 풀뿌리에 얽혀 삭아 내려앉은 갈비뼈와 척추와 두개골들, 그 뼈를 바라보고 있는, 부모이기도 하고 형제이기도 하고, 때로는 자식이기도 한 흰옷 입은 사람들, 그것들은 슬픔이라기보다 차라리 슬픔의 저편 언덕처럼 보인다.

그해 5월 계엄군의 총칼에 그 많은 사람들이 원통하게 죽은 뒤, 이제는 사람들을 죽인 바로 그 총칼이 뒤에 남은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광주에 관해 숨죽이지 않고도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한 세월이 필요했지만, 그 세월을 보내고 나니 이제 바깥 사람들은 광주를 잊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광주는 '지루한 이야기'가 되었다. 그때 이후 가장 큰 슬픔을 지닌 사람들은 오히려 입을 다물었을지 모른다. 슬픔은 풀뿌리에 얽혀 삭아 내린 그 백골과 같았을지 모른다.

사진전을 주최한 5·18기념재단은 전시회의 팸플릿에 이렇게 썼다. "5·18 민주화운동 후 급하게 조성된 묘역, 옛 5·18묘지는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을 제공하며 회한의 터로 자리매김되었고 그 후, 17년 세월은 학살의 기억을 해원의 터로 승화시킨다. 그리고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함으로써 서러운 '학살'로부터 살아남은 자를 위한 씻김의 해원공간으로 발현되었다." 이 '해원'이라는 말, 이 '씻김'이라는 말은 슬픔이 이제는 건너가 버린 저편 언덕처럼 들리고, 비애의 무의식처럼 들린다.

나는 '슬픔의 무의식'이라는 말을 문득 생각해 내고는 엉뚱하게도 내가 키우다 죽여 버린 난초 분들을 떠올렸다. 식물을 잘 키워 '푸른 손'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들이 있지만, 내 손은 거의 악마의 손에 가깝다. 난초는 늘 내 손에서 죽었다. 그러나 나도 난초를 키울 때 꽃 한 송이라도 더 피게 하고, 잎 하나라도 더 기운차게 만들겠다고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면 바로 그 정성이 결국 난초를 죽였다. 난초를 죽인 것은 내가 준 물이었고, 내가 준 영양제였고, 난초 잎 반짝이게 하려고 잎을 닦아내던 내 붓질이었다. 나는 늘 정성을 쏟았지만, 그 정성은 난초에게 늘 독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정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욕심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난초가 아니라 자식을 키워본 부모들 가운데도 내 말에 동의할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잘 키우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부모가 쏟은 정성이 항상 자식의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칭찬도 독이 되고 꾸중도 독이 된다. 부모의 과도한 기대로 시든 아이들이 있고, 부모의 무관심 때문에 자신을 버림받은 아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젊은이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애매한 중간에 기댈 수도 없다. 그것은 이중의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 난초를 죽이는 엉터리 원예가나, 자식을 병들게 하는 서툰 부모를 생각할 것까지도 없다. 저 자신이 어떻게 커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한번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명백해진다. 저 자신을 망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저 자신을 망친 사람은 많다. 게을러서, 의지가 부족해서, 사회적 여건이 따라주지 않아서, 핑계를 댈 수 있는 말은 많다. 그리고 그 변명과 핑계들은 사실이기도 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게으름을 말할 때 늘 부지런함이 있었고, 부족한 의지를 말할 때 제 최선의 의지를 끌어내려고 애쓰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러나 저를 바꾸지는 못했다. 저 자신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면 성공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저 자신도 바꾸지 못한다. 저 혼자만의 터전이 마음속 깊은 곳일수록 더 그렇다.

난초는 내 마음속 깊은 곳, 다시 말해서 나의 무의식과 같다. 나의 무의식은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그것은 내 의지에 따르지 않으며,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내 욕망이 난초를 꽃 피우게 할 수 없으며, 내 아이를 착한 아이가 되게 할 수 없다. 내 욕망이 항상 나 자신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불교의 선사들이 미망에서 벗어나라고 말할 때도 아마 이 정황을 염두에 둔 것이리라. 필경 의식과 무의식이 같은 것이 되게 하라는 말일진대, 그것은 하염없이 마음을 닦는 수고로만 이루어질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 하염없어서 그 수고로움이 수고로움인 것조차도 잊어버리면서 이루어질 것이다. 열일곱 해 동안 풀뿌리 속에 묻혀 있다가 마침내 "학살의 기억을 해원의 터로" 삼은 저 주검들, 그날의 분노와 애통한 마음을 씻김의 흙과 바람 속에 풀어놓는 저 백골들은 그래서 우리 슬픔의 무의식이 아닐 수 없고, 우리 열망의 무의식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지난겨울과 이 봄이 우리의 정치적 무의식을 바꾸는 어떤 계기를 나타낸다고 감히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공고했던 박정희 신화가 그 딸의 손에 의해 무너진 것이 이 계절이었고, 회반죽처럼 단단한 수구세력이 궤멸 직전에 이른 것도 이 계절이었다. 역사의 간계와 의지 같은 것을 느끼게 한 것도 이 계절이다. 우리는 지금 그래서 이 계절의 마지막 눈을 그리기 위한 선거를 눈앞에 두고 있다.

내 주변에는 젊은 날에 혁명투사였으며 지금도 사실상 혁명투사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대선에서건 총선에서건 투표 같은 것을 외면하고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거대한 혁명이 투표 행위로 줄어든 것이 한심해서일까. 불타버린 노적가리에서 타다 남은 낟알이나 줍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나는 그 친구들 옆에서 투표는 역사의 무의식 만들기라고 자주 되풀이 말하곤 한다.

내가 지지했던 후보가 당선되지 못했을 때, 이를테면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나는 내가 죽인 난초 분들을 생각한다. 이 나라는 내 나라지만 내 의식과 같은 나라는 아니다. 이 나라는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어떤 역사를 살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그 역사의 의지와 같은 의지를 지닌 것이 아니다. 저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은 역사의 무의식과 같다. 그 무의식이 늘 투표를 통해 나타나니 어쩌면 행복한 일이기도 하다. 성급한 사람들에게는 투표가 '어느 세월에'라고 한탄하게 하는 영원히 가망 없는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침내 꽃 피는 난초 분들이 있고, 잘 자란 아이들이 있다. 마침내 깨어지는 벽이 있다. 그래서 투표는 역사적 무의식이자 그 거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투표는 저 역사적 무의식의 세포를 바꾼다. 확실하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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